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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의 영화글쓰기

취약함 드러내기, 한 소년을 위한 철학

by 쌍차쌍조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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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2001.다르덴 형제)

지난 5월, 제78회 칸 영화제에서 다르덴 형제는 신작 《영 마더스》(The Young Mothers' Home)로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다섯 명의 어린 엄마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센터를 배경으로 삶의 균열과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 작품은 그들이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같은 질문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국내에서는 2011년작 《자전거 탄 소년》이 13년 만에 재개봉했습니다. 저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만났고, 그 날 이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스크린 너머에서 다시 마주한 시릴은 여전히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고, 그 뒤를 쫓던 제 마음도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그러나 분명히 뭔가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의 작품 세계 안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놓인 영화입니다. 《로제타》와 《아들》, 《더 차일드》로 이어지는 급진적인 리얼리즘의 흐름 속에서 신체적 긴장과 사회적 생존의 문제를 전면에 배치하던 그들은, 이 작품을 통해 보다 내면화된 정서와 조용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는, 이전 작품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는 질문을 부드럽게 꺼내어 보여줍니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난 후, 저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뤽 다르덴이 《자전거 탄 소년》을 만들며 떠올린 생각들을 오랜 시간 메모하고 곱씹으며 정리한 철학적 일기입니다.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올라온 질문들을 조용히 따라간 사유의 흐름이죠. 그리하여 이 글도, 영화와 책 사이의 그 조용한 흐름에 몸을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는 아직, 제 안에 있습니다. 말없이 버텼고, 조용히 울었으며, 누구에게도 도와달라 말하지 못했던, 바로 ‘그때의 나’. 시릴을 따라 다시 그 아이에게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어 보려 합니다.

자전거 탄 소년 시릴과 사만다의 다정한 자전거 신

취약함을 안고, 연결됨을 향해

<자전거 탄 소년>을 처음 본 건 13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재개봉 소식에 다시 극장을 찾았습니다. 그 사이 많이 변했고, 시릴도 어쩌면 그대로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나의 눈은 분명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한경은 작가의 『당신은 그때 최선을 다했다』 독서 챌린지에 참여하면서였습니다.
그 챌린지의 주제는 **‘취약성 드러내기’**였고, 그 장에서 작가는 <자전거 탄 소년>을 치유 영화로 추천했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의 취약성을 나누는 일이며, 내가 먼저 취약해지지 않으면 진짜 관계는 맺어질 수 없다.” 그 말이, 영화 속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와 겹쳐지면서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시릴의 자전거를 따라 달리는 동안, 내 안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외로움과 조용히 마주했습니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소년, 끊임없이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아이,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만난 순간 그 울컥한 장면들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말합니다. “인간은 외로울 때 사물에 말을 겁니다. 자전거는 시릴의 친구이자 유일한 동반자입니다.” 그 짧은 장면, 자전거와 대화하는 소년의 모습은 어쩌면 외로움의 가장 투명한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상처받고 방황하는 아이와 그를 조용히 안아주는 존재가 함께 그려내는 이야기입니다.
그 장면들을 따라가며 나는, 내 안의 어둠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의 사만다가 되어줄 수 있기를,
혹은 누군가의 사만다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치유 글쓰기를 하며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건 때때로 신앙일 수도 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연결됨’입니다. 사랑, 우정, 공동체, 예술, 그리고 말과 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다시 세계와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그 연결의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내 언어로 다시 써보며, 외로움의 한 자락을 조용히 흘려보냅니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인터뷰 내용중 자전거의 오브제에 대한 이야기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을 알린 영화가 <약속>이었는데, 그 영화는 제레미 레니에 주연의 '전동 자전거 탄 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제레미 레니에는 아들을 버리는 아버지로 등장합니다. 처음에 아들은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곧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해줄 미용사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는 자전거의 나라라고 하지만 <약속>과 <자전거 탄 소년>의 영화를 보면 벨기에의 신화와 벨기에 사람들의 일상에서 자전거가 매우 중요한 오브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약속>에서 이고르가 빨간색 전동 자전거를 자주 타는 게 사실이지만, 이고르의 어린 시절과 관계된 오브제는 친구들과 함께 조립한 고카트, 즉 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자전거는 보신 것처럼 유년기의 이동 수단 같은 것인데요. 생애 최초의 탈출을 위한 수단, 혹은 가족을 떠나거나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때 이용하는 수단이기도 하죠.... 저희는 사만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매우 특별한 자전거, 그러면서 동시에 소년의 친구, 즉 시릴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그의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자전거를 찾았습니다. 소년이 너무 외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자전거와 대화하는 짧은 장면도 삽입했죠. 인간은 외로울 때 특히 사물에 관심이 많아지고, 주변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영화적으로 자전거가 프레임 안에서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분명히 전동 자전거의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이 집착하듯 되찾으려는 하는 자전거는 아버지와 연결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소년이 아버지를 찾고 싶은 열망이자 스스로 균형을 잡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흔적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자전거를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소년의 친구이자, 가장 좋은 동반자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시릴은 외로움의 절정에서 자전거에게 말을 건넵니다. 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뭐라고 기념으로 남기고 싶었던 나는 아버지의 큰 자전거를 배우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골목에서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어느 순간 균형감을 느꼈을때의 희열감은 오늘날까지 자전거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일상으로 살아도 자전거를 늘 그리워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시릴이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장면에서 감정의 떨림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확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릴이 자전거를 아버지에게 배웠는지, 아버지가 사주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아버지와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나역시 혼자 배웠지만 아버지의 자전거가 존재했기에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시릴에게도, 나에게도 자전거는 부재한 아버지의 흔적과 연결된 정서적 오브제 그리고 어린 시절의 고요한 의지를 상징하는 매개체입니다. 

 

버려진 아이와 꿈꾸는 여자의 탄생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 뤽 다르덴 외, 마음산책)은 감독의 인터뷰를 엮어 만든 도서입니다. 이 도서에서 감독이 밝힌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과 사만다는 단지 상상 속에서 창조된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비롯된 고통의 이야기와, 다르덴 형제가 오래 품어온 질문들이 충돌하며 탄생한 인물들입니다.

그 창작의 출발점은 일본의 한 여성 판사로부터 전해들은 실화였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한 아이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고아원에 맡겨진 채 몇 년 동안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지붕 위로 올라가 탈출을 시도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아이의 몸짓은 하나하나가 절규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다르덴 형제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지만 “버려진 아이만으로는 영화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동시에 다른 시나리오, 한 여성 의사의 이야기도 쓰고 있었지만 역시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 모두 막다른 벽에 다다라 있던 어느 날, 그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이 버려진 아이의 고통을, 누군가의 사랑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파문이 되었고, 절망 속에 홀로 있던 아이의 삶에 한 여성이 들어서며 내러티브가 탄생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너무 기능적인 존재였습니다.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이미 직업인 인물보다, 도시의 삶과 땀 냄새, 일상의 무게를 함께 지닌 더 현실적이고 평범한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미용사’ 사만다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감기고 자르고, 손으로 만지고 물을 사용하는 미용사의 행위는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접촉과 회복의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물을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며,그들의 영화 대부분은 강변이나 흐름 위에서 펼쳐집니다. 시릴 역시 물을 좋아하는 아이로 설정되었고, 이러한 설정은 시릴과 사만다의 정서적 기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를 엮은 책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마음산책, 2023)**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뤽 다르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인물 안으로 들어가 그의 뱃속에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와 함께 발전하고, 함께 움직이고자 합니다.”

시릴은 어린 시절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할까?” “나를 인정해줄까?” 그 질문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되돌려집니다. 그리고 감독은 사만다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그녀는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아이에게 매일같이 ‘사랑받고 있는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삶, 다시 아이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사만다가 시릴에게 선물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회복입니다. 그건 누군가 먹을 것을 주고, 씻을 수 있게 하고, 사랑을 매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삶. 바로 그 삶이 시릴을 성장하게 만듭니다.

 

존 브래드쇼는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지나간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려 받고 싶다. 그것이 내가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다. 이미 오래전에 떠나간 아이,
그 아이는 지금도 내 마음 문 뒤에서 무슨 멋진 일이 일어나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자전거 탄 소년>은 바로 그 기다림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만다는 시릴의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그의 곁에 머물며, 끝내 품어줍니다.

 

시선의 높이, 그리고 사랑처럼 쏟아지는 음악

(출처: 『인간을 존중하는 리얼리즘』, 뤽 다르덴 외, 마음산책)

<자전거 탄 소년>은 감정의 결을 다루는 방식에서 매우 정교합니다. 카메라의 시선, 배우의 동작, 공간의 밀도, 음악의 타이밍까지 모든 요소가 시릴이라는 아이의 내면을 조형하기 위해 조율된 장치입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작고 폐쇄적인 사무실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다르덴 형제는 인터뷰에서 이 공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시릴의 흥분 상태와 내면의 긴장감,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절제된 미장센을 추구했으며, 인물들이 그 안에서 ‘살게 두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카메라 또한 과장되지 않게, 아동 배우 토마 도레의 시선 높이, 즉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움직이며, 인물에 대한 철저한 집중을 시도합니다. 흉골에 카메라를 고정하는 장비를 사용했고, 로우 앵글은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아이의 시선에서 어른의 얼굴을 촬영하고 다시 아이의 위치로 돌아오는 방식은, 다르덴 형제가 언제나 인물 안으로 들어가 그 뱃속에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태도를 반영합니다.

시릴은 아버지를 되찾고 싶어하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번번이 좌절됩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식당 주방을 찾아가, 창밖에서 “아빠”라고 부르며 문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시릴은 마치 초당 24프레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감정의 과열, 내면의 절박함이 배우의 몸짓을 통해 폭발하며 카메라는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약간 뒤로 물러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입니다. 이 장면에서 시릴은 끝내 아버지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는 말을 듣고 사만다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자기 얼굴을 할퀴며 자학합니다. 그때 사만다는 그저 아이를 껴안고 말합니다. “괜찮아.” 말보다는 몸으로 품어 안는 그 장면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 아다지오>가 빛처럼 쏟아집니다. 음악은 총 네 번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음악은 줄거리를 이끌거나 감정을 과잉하지 않습니다.
사운드트랙이 아닌 **외재음(영화 밖에서 들리는 음악)**으로 쓰이며, 언제나 시릴이 극한의 고통에 처했을 때, 마치 기다리고 있던 듯 조용히 내려옵니다. 영화 안에서 들려오지 않기에, 음악은 언제나 어디선가 먼 곳에 있는 따뜻함처럼 존재하며 관객과 시릴 사이의 정서적 틈을 메워줍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음악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음악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에는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직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사만다가 되고자 했던 것이 음악이라는 느낌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따뜻함과 어루만짐, 다정함에 대한 필요 같은 것 말이죠.” 이 음악은 사만다의 사랑이 시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마다 등장하며,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시릴이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선 음악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마무리됩니다.

따뜻함, 받아들여짐, 용서와 회복의 이미지가 음악과 함께 겹쳐지는 장면입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에서 기존의 무음주의를 넘어서 음악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가능성을 실험합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줄거리의 장식물로 삼지 않으며, 감정을 ‘설명’하기보다는 은유하고 감싸안는 역할로 기능하게 합니다. 장 피에르 다르덴은 연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연출이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보여줄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숨긴다는 건 단지 프레임이 아니라, 대사일 수도 있습니다. 관객은 때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때로는 캐릭터의 행동에 의해 의아해합니다.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인물의 관대함을 보여주며 관객을 놀라게 하고 싶어합니다.” 이 말은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시퀀스, 시릴이 용서를 선택하는 장면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

그러나 인간이기에 가능한 관대함,그건 다르덴 형제가 마지막까지 숨기지 않고 끝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릴의 용서와 관대함

<자전거 탄 소년>에는 여러 아버지, 여러 남자의 초상이 겹겹이 등장합니다. 자식을 버리는 생물학적 아버지,
“사만다, 이 아이야 나야?”라며 질투를 강요하는 남자, 그리고 “우리가 때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해”라고 거짓을 종용하는 서점 주인까지. 그들은 모두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소년을 외면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그 중 웨스라는 청년은 가장 위험한 아버지의 그림자입니다. 패거리의 리더이자 마약상인 그는, 스스로 고아였던 과거를 통해 시릴의 결핍을 정확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더 교묘하게 아이를 유혹할 수 있었고, 불법적인 일을 시킨 뒤, 실패하자 길거리에 그대로 내버립니다. 이 사건은 시릴로 하여금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자신이 ‘도구화’되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만듭니다. 서점 주인을 때리고, 뜻하지 않게 그의 아들과 마주친 시릴은 또래 아이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맙니다. 사만다는 경찰서에서 이 일을 합의로 정리하며 시릴에게 상처를 대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줍니다.

시릴은 이후 서점 주인을 찾아가 사과하고, 사만다의 방식 말보다 먼저 가 닿는 ‘이해의 시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나란히 달리며 사만다와 자전거를 바꿔 타는 장면은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진심으로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장면이 됩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감독이 말한 **“오랫동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릴의 관대함”**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만다의 사랑으로, 아이에게도 햇살 같은 따뜻함이 서서히 스며든 것입니다. 후반부, 시릴은 자신을 때리려는 서점 주인의 아들을 피해 나무 위로 올라가다 떨어집니다.
당황한 소년은 아빠를 부르고, 그 아버지는 증거가 될 돌멩이를 치우며 거짓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시릴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아다지오가 흐릅니다. 시릴이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화면 위에 남겨진 것은 음악뿐입니다. 그 순간, 관객은 시릴이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만다의 사랑 안으로, 음악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음악은 그가 기다리던 어루만짐이었고, 사만다는 그 음악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인간에게 아직도 관대함이 가능하다는 것, 그 관대함이 오랜 기다림 끝에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화면에 깃든 빛, 나뭇잎의 살랑임, 물의 흐름 그 모든 자연의 디테일은 시릴을 중심으로 고요히 호흡하며,
마침내 한 아이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순간을 정직하게 포착합니다.

다르덴 형제는 삶을 고발하기보다 삶 안에 남겨진 회복의 가능성을 고요히 비춥니다. 그 가능성은, 이 영화의 마지막 프레임처럼 너무 늦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을 감상하면서, 한 아이의 상처와 그 치유의 과정을 따라가는 치유의 체험을 경험하였습니다.
영화를 본 후, 뤽 다르덴 감독의 인터뷰를 엮은 책과 그의 철학 에세이 『인간의 일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가 단지 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질문을 품은 시적 사유를 펼쳐냈다는 사실에 깊이 감탄했습니다. 시릴이라는 한 소년의 절망과 분노, 그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회복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스며든, 놀라우리만큼 정제된 내러티브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철학을 점점 더 들여다보게 될수록 나는 다시, 조용히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철학적으로는 ‘인간적인 일’에 대해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도 영화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현실에는 외재음 베토벤의 아다지오가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사만다 같은 사람은, 어쩌면 신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은
영화적 구원보다 훨씬 더 작고, 섬세한 차원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이로써 한경은 작가가 추천했던 ‘취약성 드러내기’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타인과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의 연약함을 기꺼이 내어놓을 때 가능한 일이니까요. 아름다운 외재음이 없는 이 현실에서도, 누군가에게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조금씩 구원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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