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영화를 통해 열어낸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따라가며, 그 철학을 이해하고, 실제로 삶과 영화에 적용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인 이지영 교수는 들뢰즈의 사유를 단지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사다리 삼아 올라서고, 그 위에서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유의 결을 변주해갑니다.
흔히 들뢰즈의 영화철학은 존재론적 사변이나 난해한 미학 이론으로 오해받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철학이 단지 개념의 놀음이 아니라, 우리 삶을 더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사유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차분하게 설득합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익숙했던 인식의 틀과 감상의 관습을 조금씩 비틀고, 들뢰즈가 제안하는 방식처럼 ‘다르게 사유하는 감각’을 체험해보도록 안내합니다.
이지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베르그송의 지각 이론으로 석사과정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에서 영화 프레임에 관한 연구로 예술전문사를 마쳤고, 다시 서울대학교에서 들뢰즈의 운동-이미지를 주제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화미학으로 두 번째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세미오시스연구센터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녀는 『BTS 예술혁명』,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등의 책을 집필했고, 『푸코』, 『들뢰즈: 철학과 영화』 등의 번역을 통해 영상예술과 철학 사이의 접점을 성실하게 탐구해오고 있습니다. 들뢰즈 철학이라는 낯선 개념의 숲을, 영화라는 익숙한 감각의 길과 연결시켜주는 이 책은, 우리에게 사유의 다른 리듬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들뢰즈는 영화철학으로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언제나 제게 철학적 자극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텍스트였습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비판하면서 욕망과 주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었고, 그 사유는 니체적 계보 안에서 현대적으로 확장된 리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되기’, ‘차이’, ‘탈중심화’ 같은 개념들은 제 사고를 뒤흔들며,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마저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들뢰즈가 영화에 품은 깊은 애정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시네마 1』과 『시네마 2』의 난해한 사유 또한 보다 내밀하게 다가왔습니다. 들뢰즈가 왜 영화를 철학의 장으로 삼았는지, 그 이유는 영화가 우리를 ‘이미지로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사유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베르그송은 “이미지는 곧 존재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세계는 이미지들의 총체이며, 인간의 지각, 기억, 정동 또한 이 이미지의 흐름 안에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들뢰즈는 이 관점을 이어받아,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세계가 구성되는 방식 자체를 사유합니다. 다시 말해, 영화는 단지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생성되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존재론적 장치입니다.
영화는 정적인 회화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사유하는 이미지입니다. 숏, 몽타주, 클로즈업과 같은 영화의 형식들은 모두 운동의 리듬 안에서 시간-이미지의 형식을 드러냅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운동-이미지를 통해 시간에 접근하고, 더 나아가 시간-이미지를 통해 존재 자체를 새롭게 사유합니다.
현대 영화는 ‘시간 그 자체’를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안토니오니, 브레송,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인과적 서사나 명확한 행위보다는 정지, 파열, 비결정성, 침묵과 같은 형식을 통해, 직접적인 시간의 현시를 시도합니다. 이처럼 감각을 흔드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을 넘어, 존재의 조건과 그 가능성에 대해 묻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본질은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며, 들뢰즈는 철학이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이 되거나, 개념을 낳게 만드는 감각의 구성물, 리듬의 장, 시간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의 도구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입니다.
요컨대, 영화는 이미지와 운동, 시간, 감각, 존재를 탐구할 수 있는 내재적 평면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통해 철학을 확장하고, 감각을 재구성하며,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펼쳐 보입니다. 이 책은 그 시도의 여정이자, 철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가 어떤 감각의 변화를 겪을 수 있는지를 함께 묻고 있습니다.
들뢰즈 영화철학의 이해
1) 운동-이미지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를 통해 존재의 시간성을 사유합니다. 그는 『시네마 1』에서 영화 이미지를 지각, 정동, 행위 이미지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 감각-운동 도식이라는 영화적 체계를 설명합니다. 이 도식은 주체가 세계를 지각하고, 그 지각을 통해 반응(행위)하는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한 ‘운동-이미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과, 우리가 그 움직임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이미지로 사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주인공이 길을 걷다 어떤 장면을 보고 놀라며 도망친다면, 이 장면 속에는 일정한 순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각(보다) → 정동(놀라다) → 행위(도망치다)
이와 같은 감각의 흐름은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감각-운동 도식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운동-이미지’입니다.
운동-이미지는 세계가 운동하고, 인간이 그 운동에 반응하며, 이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위에 놓여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도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서사적 흐름에 감정이입하게 됩니다. 범인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며, 갈등이 해소되는 구조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요.
들뢰즈는 이 구조를 퍼스의 기호학과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을 바탕으로 철학화하며, 운동-이미지를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지각 이미지, 정동 이미지, 행위 이미지, 연합 이미지, 액정 이미지. 그중에서도 핵심은 지각→정동→행위로 이어지는 삼단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영화가 세계를 어떻게 보여주는지, 그리고 관객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고 따라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도식이 깨지는 순간에 주목합니다. 즉,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인물이 반응하지 않으며, 세계가 정지하거나 낯설어질 때, 그 틈에서 새로운 이미지 유형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네마 2』에서 다루는 ‘시간-이미지’입니다.
2) 시간-이미지
시간-이미지는 운동 없이, 시간 그 자체를 이미지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운동-이미지가 세계의 움직임과 반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시간-이미지는 그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에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더 이상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때, 이야기는 정지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과 정지 속에서 우리는 사건의 배경이 아닌, 시간 그 자체를 감각하게 됩니다. 들뢰즈는 이를 감각-운동 도식의 ‘파열’이라고 부릅니다. 세계가 더 이상 인물의 행동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시간은 배경에서 주체로 떠오릅니다.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탈기아를 떠올려봅니다. 이 영화에서는 뚜렷한 사건 없이, 인물이 걷고, 멈추고, 긴 침묵 속에 머물며 무언가를 느낍니다. 사건이 아닌, 존재의 상태를 보여주는 이미지들. 관객은 ‘왜 이 장면이 필요한가’를 묻기보다 ‘이 장면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를 감각하게 됩니다.
브레송의 무셰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녀 무셰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어떤 인과적 행위도 하지 못합니다. 그녀의 침묵과 무기력은 오히려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삶은 어떤 시간 위에 놓여 있는가?”
운동-이미지가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구조라면, 시간-이미지는 문제 속에 머물며 존재의 무게를 응시하는 구조입니다. 카메라도 달라집니다. 사건을 따라다니기보다, 사유하고, 기다리고, 침묵하는 눈이 됩니다. 노스탈기아의 걷는 장면이나, 정사에서 인물들 사이의 정적은 사건보다 존재를, 이야기보다 감각을 드러냅니다.
이때 카메라는 인간의 눈처럼 세계를 ‘보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하는’ 도구가 됩니다. 들뢰즈는 이를 ‘탈중심화된 지각’이라 부르며, 인간의 시선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운동과 시선이 영화 속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특정 부분에 집중하고, 선택적으로 기억하지만, 카메라는 장면 전체를 담아냅니다. 이 무의식의 층위까지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광학적 무의식’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존재를 드러내는 감각의 장이 됩니다.
결국, 운동-이미지는 존재를 운동 속에서 드러내는 방식이고, 시간-이미지는 존재가 운동 없이도 감각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전환을 통해 들뢰즈는 영화가 단지 사건을 나열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를 사유하는 철학적 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의 이러한 사유는 니체의 철학, 특히 영원회귀와 ‘되기’, 그리고 능동적 힘의 개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3) 니체의 재발견
들뢰즈는 니체를 단순한 철학 개념으로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화 이미지 속에서 니체의 사유가 실현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핵심은 세 가지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영원회귀.
니체의 영원회귀는 흔히 숙명처럼 반복되는 삶으로 오해되지만, 들뢰즈는 그것을 차이를 품은 반복,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다르게 되기’의 끊임없는 생성으로 해석합니다. 영화는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도 컷, 몽타주, 시점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정동을 생성합니다.
예컨대, 고다르의 알파빌, 레스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는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만, 관객의 감정, 기억, 맥락이 달라지며 전혀 다른 사유를 불러일으킵니다.
둘째, 되기.
되기란 고정된 자아의 해체입니다. 니체의 사유는 ‘신의 죽음 이후’ 인간 주체가 해체되고, 되기-동물, 되기-여성, 되기-아이라는 지속적인 정체성의 변형을 말합니다. 들뢰즈는 영화 속 인물이 하나의 자아로 고정되지 않고, 정동과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질 때, 그 모습이 곧 ‘되기’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브레송의 무셰트는 무기력한 반복 속에서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며, 정체성의 경계를 흐립니다.
셋째, 능동적 힘.
니체의 윤리학은 삶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되기를 선택하는 힘을 말합니다. 들뢰즈는 영화를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매체로 보지 않고,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생성하는 능동적인 예술로 이해합니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고다르의 후기 영화들처럼 인과적 서사에서 벗어난 영화들은 이미지 자체가 사유하고 생성하는 힘을 품고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영화는 니체의 사유가 이미지로 구현되는 예술입니다.
- 영원회귀 → 시간-이미지의 반복과 파열
- 되기 → 정체성의 해체와 감각의 변형
- 능동적 힘 → 영화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사유
들뢰즈는 『시네마 2』에서 시간-이미지를 통해 이러한 사유를 철학화하며, 영화를 단지 미학의 대상이 아닌,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의 장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화라는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삶은 어떻게 생성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그 물음에, 철학과 예술이 함께 길을 낼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들뢰즈와 영화철학 시네마의 적용
이 책은 영화를 바라보는 기존의 인식과 통념을 전복하고, 익숙한 감상의 틀을 벗어나 ‘다르게 사유’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이끕니다. 들뢰즈의 영화철학은 철학 개념을 영화에 단순히 대입하거나 분석의 틀로 삼는 것을 넘어, 철학 자체가 영화 속 이미지들과 만날 때 비로소 살아나는 사유의 사건으로 자리 잡습니다.
『시네마』의 적용 파트는 그러한 사유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탐구한 장으로, 네 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들뢰즈 철학의 실제적 감각을 조명합니다.
5장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통해 ‘이미지의 평면성’ 개념을 분석합니다. 이 평면성은 들뢰즈 영화철학의 핵심인 비재현적 이미지의 사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현실화되지 않은 정동과 감각을 통해 전혀 새로운 미적 준거를 제시합니다. 이미지 자체가 서사를 압도하며, 관객에게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충격이 파고듭니다. 이때 관객은 단지 이야기를 따라가는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함께 사유하게 됩니다.
6장에서 다루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마더는 들뢰즈의 ‘정동 이미지’가 지닌 윤리학적 가능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 영화는 감각운동 도식을 따라 명료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을 ‘받아들일 수 없음’의 감정 상태에 머무르게 하며, 그 감정이 점차 사유로 전이됩니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정동 이미지의 역능을 반영하며, 윤리적 응시의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7장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낯선 물체를 분석하며, 전통적인 영화 문법이 해체될 때 가능한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제시합니다. 들뢰즈의 ‘이야기 꾸며대기(fabulation)’ 개념은 비선형적 시간성과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통해 영화가 어떻게 정치적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영화는 탈영토화된 사유의 장이 되고, 그 안에서 관객은 새로운 시간과 감각, 진실의 구조를 마주하게 됩니다.
8장에서는 박찬경 감독의 만신을 다룹니다. 이 작품은 무속과 애도라는 형식을 빌려 시간에 접근하는 독특한 영화적 실험입니다. 굿이라는 퍼포먼스의 반복적 리듬, 현실과 환영이 중첩되는 몽환적 구성, 그리고 주술적 시간이 흐르는 영상은 시간-이미지의 윤리적 차원에 다가갑니다. 영화는 애도라는 감정과 형식을 통해 사유의 장을 열고, 관객에게 존재와 기억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처럼 이 책의 ‘적용’ 파트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시네마』에서 제시된 철학 개념들을 단순히 적용하거나 분석하는 도구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학이 영화 이미지와 만나는 그 순간에 생겨나는 감각적 진동, 사유의 생성, 존재의 울림을 포착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이론의 생명력을 확장하며,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철학이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모색합니다.
들뢰즈 이후, 포스트시네마와 관객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들뢰즈는 『시네마 2』의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분류한 시간-이미지 이후 새로운 이미지들이 등장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영화 이미지의 위기를 언급하며, 비디오·텔레비전·컴퓨터 등 기술 기반 이미지들이 기존의 영화 이미지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디지털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985년, 디지털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들뢰즈는 ‘전자기적 이미지’라는 표현을 통해, 필름 기반의 고전적 영화와는 다른, 기계적이고 연산적인 이미지의 등장을 예감합니다. 그는 전자기적 이미지에 대해 명확한 비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고 유보적인 어조로 다루었습니다. 감각–운동 도식과 정동을 통해 몸과 세계의 관계를 사유했던 영화 이미지와 달리, 전자기적 이미지는 그 관계를 압축하고, 계산하며, 재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유를 위협할 수도, 혹은 사유의 문을 새롭게 열 수도 있는 양가적인 가능성의 문턱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들뢰즈가 조심스럽게 예감했던 그 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튜브, 틱톡, 인공지능 이미지 생성기, 디지털 애니메이션, 가상현실… 이 모든 것들은 들뢰즈가 언급한 전자기적 이미지의 현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영화, 포스트시네마는 그 개념을 단순히 기술적 진보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들뢰즈가 열어놓았던 사유의 여백 위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지영 교수는 『들뢰즈의 영화철학』 3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단지 들뢰즈 이론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사유를 오늘날 영상 환경 속에서 어떻게 확장하고 갱신할 수 있을지를 탐색합니다. 들뢰즈는 영화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녔지만, 기술 기반의 이미지들, 특히 전자기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시네마 2』가 출간된 지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디지털 이미지는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예술 형식 그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지영 교수는 들뢰즈의 개념들을 오늘의 영상 환경에 적용하려면,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과감히 넘어서려는 철학적 실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강조합니다. 오늘날의 영상예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과 감각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감각을 요구하고, 그 감각은 새로운 윤리와 존재론을 불러옵니다. 포스트시네마는 바로 이러한 사유의 흐름 위에서 질문을 던지는 자리이며, 새로운 영상 시대의 관객 역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철저히 이미지 중심의 철학을 구축했으며, 관객은 이미지에 의해 사유되고 감각되는 존재로 암묵적으로 전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전제가 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관객은 단지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지를 생성하고, 유통하며, 다시 배열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흐름에 감응하는 눈일 뿐 아니라, 그 흐름을 편집하고 해석하고 다시 내보내는 손이기도 한 것입니다.
플랫폼, 알고리즘, 인터랙티브 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관객은 더 이상 고정된 자리가 아닌, 끊임없이 변형되는 존재 양식으로 등장합니다. 이지영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관객론’의 결합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새로운 철학적 과제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오늘날의 관객은 시네마를 감각하는 존재이자, 시네마 자체를 새롭게 재배열하고 구성하는 생성의 주체입니다. 이는 들뢰즈가 말했던, ‘사유의 주체는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라는 철학적 태도와 깊이 연결됩니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그 철학은 지금 여기의 관객이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다시 태어납니다. 그것은 낡은 개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품은 생성의 반복이며, 우리가 새로운 시네마적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철학의 ‘되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실 복잡한 이론을 정리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깊이 감상하다 보면, 문득 그런 사유들이 스치듯 연결되곤 했습니다. 이미지 속에 머무는 감정, 시간의 파열, 어떤 장면을 보며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여운… 그것이 들뢰즈의 철학과 만나면서 조금씩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이 글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느끼고, 사유하고, 감각하고 있으니까요. 철학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낯선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왜 이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의 감상 안에서도 또 하나의 철학이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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