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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의 영화글쓰기

공인중개사의 영화 글쓰기

by 쌍차쌍조 202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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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체기에 경제적 자유가 있는가?

 미술관에 다녀오면서 15년 전의 기억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습니다. 수원신문에 썼던 칼럼을 찾아 보고 피식 웃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 왔는지 마음에게 물어봅니다. "재테크에 성공 하셨나요?" 시간을 거슬러 돈의 흐름이 빠르게 흐르던 그 시절의 단상을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그때 그랬지..... 머무를 것인가? 

현업 공인중개사 5년차인 나는 그동안 주로 투자 고객 상담을 했다. 창업 당시 돈 개념이라곤 전혀 없는 보통 아줌마였다. 그래서 공인중개사로서 고객과의 상담을 위해 많은 교육을 이수했다. 그 당시 교육 과정 중 귀에 솔깃한 것이 재개발이었다."간절히 원하면 얻으리라" 라는 말이 실감나는 일이었다.내가 보통 아줌마에서 전문가의 공인중개사로, 투자자로서 한 걸음 내 딛게 해준 투자 상품이었다.2003년에 도정법이 새로이 생기면서 재개발, 재건축들은 이 법에 의해 시행됨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디가 재개발 된다더라....재건축이 된다더라.... 하는 소문에 의해 투자를 실행하는 분들이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게 우리의 부동산 투자 현실이었던 것이다.작은 동네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한 나는 '재개발'이란 투자상품이 안성맞춤이었다.수원에서 무슨 재개발이 되겠느냐,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빌라는 사는 순간부터 손해라는 선입견으로 남편조차도 그런게 무슨 투자냐고 할 정도로 재개발 투자에 무관심했던 수원분들이 많았다. 재개발 투자 상담을 위해 똑같은 강사님의 같은 강의를 10번 정도는 들은것 같다.내가 지식으로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는것만으로는 부족했고 고객 앞에서 항상 떨리고 자신감이 없어서 강사님의 멘트를 똑같이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역시 투자에 경험이 없고 무지했기에 신중한 투자를 하기 위해서였다.투자는 아는만큼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투자는 위험이 클수록 수익이 높은건 다들 아는 상식이고 그 위험은 학슴에 의해 감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학습이란, 경험만큼 효과적인게 있을까만 너무 수업료가 비싸다. 이러하니 재테크 교육장에 다녀보면 아줌마들이 역시 대세다.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며칠 전 우리 중개사무소에 아줌마 고객 한 분이 방문하셨다.아파트를 2주택 소유하고 계신 분인데 요즘은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재건축 아파트에 대해, 재개발 빌라에 대해, 신규 분양 아파트는 어떤지,,, 등등사실 이런 분들의 자주 방문하는 중개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느낀점이다.그동안의 부동산 투자 시장은 국지적으로 보고 투자를 해도 언젠가는 올라주는 시대였다.앞으로도 그럴까? 많은 투자 고객들이 망설이고 있는 시기이다.투자 시장의 변화를 우리 보통 아줌마들도 느끼고 있는 때인 것이다.이젠 투자지도를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어느 아파트가 오를까가 아니라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이 행복할까?어디에 투자를 할까가 아니라 어떤 투자 상품들이 있을까?투자를 해서 성공하고 싶다가 아니라 투자하는 동안 행복해야 한다.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버는 건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것이다.그러기 위해서 자신에게 투자를 해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소득수준이 높아졌다는 등의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내가 재무설계 공부를 하고 아테크를 위해 미술작품 감상하는 활동들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질타를 받는다.정말 그럴까? 수원에서 처음 재개발 투자를 소개할 때도 많은 분들의 우려속에서 시작했다.도정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재개발, 재건축 투자에 분들이 있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특히, 주택을 거주하면서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했던 나를 포함한 보통 아줌마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수원신문에 기고글 2009년) 

 

방화수류정을 화폭에 그리는 작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뒷모습을 그려 봄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는 돈보다 나를 먼저 바꾸라는 '보도섀퍼'의 '돈'을 보면 단순히 돈을 벌고 모으는 것을 넘어서 '나는 왜 돈을 벌고 싶은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합니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에서는 부와 가난, 지배와 피지배, 전통과 변혁, 정치와 전쟁 그리고 작가의 자부심과 명예를 예리한 통찰로 볼 수 있습니다.
재무설계를 공부하고 아테크에 관심을 갖고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삶의 본질에 가까워졌습니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서를 읽으며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기도 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15년의 시간은 깊은 무의식에서 수많은 나를 길어 올려 분석하고 해체하기에 그리 짧지만은 않았습니다.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경제적 관념을 치유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재테크가 단순히 돈을 불리는 형태가 아닌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짚어 보았습니다. 
인생에 정체기가 왔을 때 경제적 자유가 있는가는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최적화 된 삶을 살 것인가와 최소한의 삶을 살 것인가의 선택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자산이 여기에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는 반 고흐의 모습을 만들어줘 

이 글은 AI로 생성된 고흐 이미지와 인간 고흐의 실제 삶을 나란히 놓고, AI가 창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이미지들은 단순한 시각 보조가 아닌, 인간의 감정과 기계의 상상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AI가 그려낸 고흐는 단번에 완성된 게 아니었고, 그 과정을 AI와의 협업으로 되짚어가며 인간 창작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합니다. 
AI의 기술 발달이 날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 빈 센트 반 고흐가 더욱 그리워집니다.동생 테오와 주고 받은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보면 그의 내면 세계와 예술 철학, 삶의 고통을 가장 진실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AI의 작품을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반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만들면서 고흐의 일대기를 편지글을 통해 느껴봅니다.

AI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는 반 고흐를 만들어줘 하면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이미지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들어 준 이미지에 섬세한 그림 묘사를 주문해야 작품다운 이미지가 생성됩니다. 마치 고흐가 살아서 이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만은 나의 이 노력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이었습니다. 

 

몇 번을 거듭해서 생성한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는 반 고흐

 

 

태어남과 방황의 시기 (1853~1880)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그루트 쥔더르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을 관찰하며 깊은 내면의 사유에 잠기곤 했습니다. 청년기에는 미술 상점에서 일하다가 선교사로 활동하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삶에 독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청년 시절, 고흐는 가게에서 손님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잦은 다툼을 겪었으며, 런던에서는 신비주의에 심취해 해고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신학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낙방하여, 평신도 자격으로 전도 활동만을 허가받았습니다.

고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나 최하층민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광신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은 교회로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80년, 그동안 해왔던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화가로서의 각성 (1880~1886)

27세가 되던 해, 빈센트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통스럽지만, 나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그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드로잉의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그는 다섯 살 아래의 미술학도 라파르트에게서 드로잉을 배웠으며, 외사촌이자 헤이그 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배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며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갈등은 깊어졌고, 과격한 성격으로 인해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안톤 모배와의 결별로 이어졌고, 이후 빈센트는 매춘부 출신의 여성 크리스틴과 동거하며 삶을 이어갑니다. 가족의 반대와 그림에 전념하기 위한 선택으로 인해 그는 그녀와 어린아이를 떠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속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브뤼셀과 헤이그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특히 광부들의 삶을 그리며 ‘가난한 자들의 화가’로 불리기를 바랐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조와 투박한 붓질이 특징이며, 대표작으로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테오는 늘 형의 경제적·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형의 진정성은 언젠가 세상에 닿을 거야”라며 변함없이 격려했습니다.

 

파리에서의 변화와 색채의 발견 (1886~1888)

고흐는 파리로 이주한 후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화풍에 큰 전환을 맞이합니다. 그의 캔버스에는 밝은 색채, 짧고 역동적인 붓질, 빛에 대한 탐구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와의 만남은 그의 표현 세계에 강한 영향을 주었고, 램브란트나 밀레의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밝고 생동감 있는 화풍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자화상도 많이 그리기 시작했으며, 색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집니다. 고갱, 수라, 로트렉 등 당대의 주요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고흐에게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색은 나의 고통을 노래하게 해주는 유일한 언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도시 생활은 고흐의 예민한 신경을 더욱 자극했고, 점차 정신적인 불안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를에서의 열정과 붕괴 (1888~1889)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강렬한 색채와 빛, 태양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고흐다운’ 작품들을 탄생시킵니다. 대표작인 《해바라기》, 《노란 집》, 《밤의 카페 테라스》 등이 이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그는 그곳의 밝고 눈부신 햇살에 깊이 감격하며, 새로운 예술적 정점을 이루는 걸작들을 남깁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새로운 예술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품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끊임없이 합류를 권유했습니다. 결국 장 폴 고갱이 아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갈등을 낳았고, 동거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결국 격렬한 말다툼 끝에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자해를 저지르게 되었고, 그 사건 이후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제 나는 그림으로 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쓴 편지에서 그 고통을 고백합니다.

 

생레미의 병원에서 (1889~1890)

고흐는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병과 싸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시기에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깊은 열망으로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자화상》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반복적으로 “테오,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너야, 그리고 그림이야”라고 썼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고통을 초월하려 했으며, 예술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해 줄 본질적인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베르에서의 마지막 날들 (1890)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의 아들이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뒤,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에도 그는 하루에 한 점씩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작업에 깊이 몰입했지만, 내면의 절망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1890년 7월, 그는 들판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였고, 이틀 뒤 생을 마감했습니다. 동생 테오는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눈물로 형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테오 역시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형 고흐 곁에 함께 묻혀 있습니다.

현재는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생전의 고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위대한 화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3년 유작전 이후였으며, 이후 20세기 초 야수파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감과 지표가 되었습니다.

고흐가 남긴 말
 
"나는 나의 예술에 내 영혼을 담았고, 내 생명을 바쳤다.
나의 그림은 내 편지이고, 내 기도이며, 내가 본 빛이다."

 

나는 왜 예술을 이야기하는가, 돈보다 먼저 치유가 필요했던 마음에게

부동산을 오래 다뤄왔고, 수많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온 나는, 말하자면 재테크라는 현실 세계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언어로 살아가다 보면 가끔, 아무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어린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고, 어쩌면 내가 내 안의 나에게 들려준 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마음이 다칠 때면, 돈을 좇는 행위 자체가 나를 더 상처입히는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이야기보다, 영화 속 장면 하나에 마음을 기댄 채,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달래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익은 없었지만, 위로는 있었습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을 쏘아 올리듯, 조용하고 단단하게, 글이 나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물어봅니다. 15년이 흘러, 나는 경제적 자유를 얻었는가?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하지만 삶을 사랑하는 법, 고요하게 나를 껴안는 법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기에, 수익성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 감상과 치유 일기처럼 시작했지만, 어느새 ‘영화평론 글쓰기’로 길이 생겼습니다. 그 길은 마음을 살피는 일이면서 동시에 ‘쓸모’를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들은 한 유튜버의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월 50만 원 수익을 내는 블로그는, 마치 월세 50만 원을 받는 오피스텔과 같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1억짜리 오피스텔에 투자해 월세 50을 받는 것과, 초기 비용 없이 블로그로 50을 버는 것.
내가 지금 하는 글쓰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나에게는 자산이 된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쓸모’이자 재테크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부동산 이야기를 내려놓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임대차 계약서를 보기 어려워 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고, 기본적인 정보만 알았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상황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영화와 철학, 삶을 껴안는 글을 쓰면서도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 되는 부동산의 기본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삶은 결국 재미있는 것을 먼저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재미는 나에게서 시작되어, 누군가에게 닿고, 그렇게 다시 나에게 돌아올 테니까요. 쓸모가 없다고 느꼈던 순간을 지나, 나는 이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임을
한 문장씩 꺼내 보이려고 합니다. 만약 그것이 수익이 된다면 좋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쓸모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나의 쓸모를 삶으로 묻는다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운영하던 어느 날, 돈이 오가는 그 모든 과정이 문득 예술처럼 느껴졌습니다. 수많은 삶의 무게들이 부딪히고 흘러가는 그 자리에서, 나는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렸고, 그처럼 예술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한 채, 동생 테오의 지지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붓질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나는 그 고독한 예술가의 마음을 부동산의 현실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나는 중개사무소를 접었습니다. 예술적 재능도 없고, 경제적 자유도 아직은 멀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쓸모를 묻고 싶었습니다. 지난주, 교토 사찰 순례 중 마주한 금각사. 그 화려한 금빛 이면에 숨겨진 한 수행자의 결심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습니다. 금각사를 짓고, 결국 수행터로 돌린 요시미쓰처럼, 어쩌면 나 역시 예술을 통해 초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금빛 찬란한 탑을 짓고도, 그 끝엔 오직 부처님께 귀의했던 그처럼 나 또한 내 삶을 돌이켜 나의 쓸모를 되묻습니다. “자기를 섬으로 삼으라”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이제 나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삶의 쓸모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수처작주입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나누고, 배움을 기록하며 내가 쓸모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들려주고자 합니다.
이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나의 섬을 조용히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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