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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의 영화글쓰기

영화 자전거 탄 소년 시릴을 치유하는 철학

by 쌍차쌍조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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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에 대하여>(뤽 다르덴)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자전거 탄 소년>다르덴 형제의 동생 뤽 다르덴 감독이 영화를 촬영하며 메모한 글을 책으로 엮은 철학에세이입니다. 그의 이 에세이는 영화존재의 토대이자 심리적 씨앗이며 철학적 배경 그 자체입니다. 뤽 다르덴은 시릴이라는 소년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릴의 몸짓과 침묵, 분노, 폭력 충동,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작은 변화 속에서 "신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1장에서 제시된 죽음의 불안과 신의 부재, 그리고 7장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가능성과 공감의 회복은 <자전거 탄 소년>의 장면마다 정서적 수맥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릴이 아버지를 집착하듯 찾는 장면은 존재를 확인해줄 절대적인 타자를 향한 첫 절박한 외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만다의 무조건적인 수용은 시릴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이는 외부에 대한 최초의 신뢰를 의미하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7장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뤽 다르덴은 이 책의 서문에서 "시릴을 통해 내 안의 어린아이가 다시 깨어났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전거 탄 소년>이 뤽 자신의 내면과 철학을 시적으로 구현한 영화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자전거 탄 소년>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실존적 질문에 대한 시적 응답이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그 질문과 응답 사이의 내면적 사유를 풀어낸 철학적 일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에피그래프

“결국 삶은 죽음을 향한 순례입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신 없는 세계, 존재의 불안 속에서 깨어나는 시릴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니체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신은 죽었다.” 뤽 다르덴은 이 문장을 단순한 철학적 전언이 아닌,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던지는 치열한 질문으로 새깁니다. 신이 부재한 세계, 더 이상 구원의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 물음은 곧 영화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의 몸짓과 눈빛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사랑 없이 버려진 아이, 어디에도 기댈 수 없고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시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조차 끊임없이 밀쳐지며, 결국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합니다.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불안은 존재의 심연을 향한 가장 순수한 길이다.” 뤽 다르덴은 이 불안을 시릴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냅니다. 그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마주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에게 삶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절벽 위의 자전거처럼 위태롭고, 오직 앞으로 달리는 속도만이 자신을 지탱해 줍니다.

하지만 그 달림조차도, 무언가를 도피하려는 몸짓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기억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로 돌아와 시릴을 덮칩니다. 그는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조차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이 장을 읽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삶은 죽음을 피함으로써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그 찰나는 반짝이며 존재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프루스트가 말했듯, 빗소리, 밀크커피 한 잔, 바람의 감촉 같은 작은 감각들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가장 살아 있는 증명이었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이처럼 존재의 연약함, 특히 죽음의 공포와 시간의 고통 속에 내던져진 인간을 응시합니다. 시릴이란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두려움을 끌어안고도 살아낼 수 있는지를, 고통이라는 강을 어떻게 건너는지를 목도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한 아이로부터.

 

타자의 무한한 사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이 전환되는 순간, 인간은 고립된 존재에서 다시 관계하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존재의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 ‘관계’와 ‘사랑’을 통해 그 불안을 껴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의 형식으로 나아가는 부분입니다.

 

  • 핵심 사유:
    인간은 죽음과 시간의 직선성 안에 던져진 존재지만,
    **타자의 무조건적 수용(사랑)**을 통해 고립된 시간에서 함께 사는 시간,
    ‘관계의 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
  • 철학적 연결:
    →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는 여전히 고독한 주체이지만,
    뤽 다르덴은 거기에 "타자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기적을 덧붙입니다.
    → 이 사랑은 존재의 구조를 바꾸는 ‘시간의 전환’이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재구성입니다.
  • 영화적 구체화:
    사만다의 사랑은 시릴을 구합니다.
    그녀는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아이가 망가져 있어도, 화내도, 도망쳐도 그 곁에 머물러 주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관계 이전에, **‘존재의 보호막’**이 됩니다.
  • 독자적 사유와 연결: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도움을 받아본 사람이다.”
    이 문장이 바로 핵심 감정입니다.
    타자의 존재가 기억 속 어딘가에 있었다는 경험,
    그 사랑의 기억이 시릴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다시 존재하게 만듭니다.

정리하자면:

              구조중심                                                              주제주요                                  철학영화적 대응

 

  죽음과 불안, 존재의 위기 니체, 하이데거 시릴의 고립과 불안, 폭력
  타자의 사랑이 불안을 전환시킴 레비나스, 다르덴 사만다의 등장, 관계의 시작

 

 

 에피그래프

“살고 싶다는 감각은 누군가의 눈빛에서 시작됩니다.
그 눈빛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거기 있어 줍니다.”

 

타자의 무한한 사랑, 시간을 바꾸는 기적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한 길은 이미 시작됩니다. 하지만 뤽 다르덴은 묻습니다. “어떤 사랑은 이 시간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강요하지 않으며, 다만 한 존재가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시선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사만다는 그런 타자였습니다.

사만다는 시릴이 무엇을 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는 폭력적이고 불신으로 가득하며 언제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지만, 그녀는 그 모든 태도를 ‘있어도 되는 것’으로 수용합니다. 그것은 교화가 아니라, 곁에 머무는 행위이며, 함께 있어 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시릴을 변화시킵니다. 처음에는 반발하고 도망쳤던 아이는 점차 사만다의 존재에 기댑니다. 그는 아직 말하지 않지만, 그녀가 만든 보호막 안에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감각을 느낍니다. 타자의 무조건적 수용 속에서, 아이는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시간이 바뀝니다. 더 이상 과거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의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아이는 처음으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살아보려 합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변화, 아주 느린 회복의 시작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가 다시 관계 맺는 장엄한 재탄생이 숨어 있습니다.

뤽 다르덴은 말합니다. “죽음을 향해 흐르던 시간은 사랑을 통해 삶을 향한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이 문장은 신비롭고도 구체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다르덴의 세계에서 사랑은 존재를 바꾸는 철학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시릴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움켜쥐었던 고통의 방패를 내려놓게 만들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아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감각으로 각인됩니다. 그 기억이 존재할 때, 인간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이 놀라운 전환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자전거를 달리는 아이가 마침내 잠시 멈추는 장면, 그 안에는 폭력의 충동 대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감정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뤽 다르덴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존재를 고립에서 관계로 데려갑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인간적인 기적입니다.

 

 

핵심 사유                         타자의 무조건적 사랑은 인간의 시간을 바꾼다. 고통의 시간을 관계의 시간으로, 직선적 죽음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시간으로 전환시킨다.
철학적 - 시간의 직선성과 인간의 고립 (하이데거)
- 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관계 (레비나스)
- 사랑은 존재 구조를 전환하는 힘 (다르덴)
- 사랑은 ‘지금-여기’에서만 가능한 사건
다르덴의 사유 -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아본 사람이다.”
- “죽음을 향한 시간은, 타자의 사랑 속에서 삶을 향한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감상              - 인간은 단지 감정으로가 아니라 관계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 사랑이란 어떤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있어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시선이다.
- 나는 그 조용한 기적을 믿는다.

 

에피그래프

“악은 닫힌 상상력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은 그 상상력을 다시 세계를 향해 열어준다.”

 

닫힌 상상력과 윤리적 거리, 그리고 ‘존재해도 된다’는 말 없는 인정

뤽 다르덴은 악을 설명할 때, 전통적인 종교나 도덕의 어휘를 빌리지 않습니다. 그는 악을 닫힌 상상력이라 부릅니다. 우울과 고립, 타자와의 단절 속에서 세계를 향한 감각이 차단되고, 그 단절이 반복될 때 인간은 결국 타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게 됩니다. 이 악은 시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하고, 일상적이며, 인간적인 절망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이 뤽 다르덴이 말하는 우울의 토대이며, 『인간의 일에 대하여』 6장에서 제시되는 가장 급진적인 통찰입니다. 다르덴에게 있어 이러한 닫힘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타자의 고통 앞에 머무는 ‘사랑의 형식’, 다시 말해 윤리적 거리감 속에서의 응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를 상상한다.” 여기서 말하는 출구란, 치유나 위로처럼 쉽게 합의되는 해답이 아닙니다.
그는 타자의 고통을 설명하거나 덜어주려 하지 않고, 그 고통 앞에서 말없이 머무는 윤리적 동행을 추구합니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장면들은, 그 어떤 플래시백이나 감정 연출 없이 단지 그 몸의 무게와 거리감을 따라가며 존재의 닫힘을 시각화합니다. 카메라는 결코 인물보다 앞서 가지 않고, 언제나 곁에서,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갑니다. 그것은 존재를 해석하려는 시선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려는 시선입니다. 다르덴의 카메라는 말을 걸지 않고, 대신 묻습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인간의 일에 대하여 9장은 이 사랑의 태도를 민주주의의 조건으로까지 확장합니다. 다르덴은 민주주의를 제도나 체계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너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말이 전해지는 사회, 말없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응시하고, 기다려주는 관계의 가능성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군중 속의 익명성이 아니라, 존중받는 개인,
존재가 허락된 타자로서 비로소 살아갑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릴이 잠시 멈춰 서는 순간, 카메라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선이 전하는 유일한 메시지는, “너는 살아 있어도 괜찮다”는, 말 없는 인정입니다.

닫힌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태도입니다. 다르덴은 말합니다.
악은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시작되고, 예술은 그 고통을 함께 바라보는 방식으로 악에 저항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윤리적 거리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화가 설명하지 않도록, 해석하지 않도록,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도록 조율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속감은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고,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고개 돌림’이야말로, 다르덴이 철학으로부터 가져온 예술의 몸짓입니다.

     

악의 정의 악은 선과의 대립이나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닫힌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타자와의 관계 단절, 감정의 폐쇄, 공감의 차단 속에서 태어난다.
우울의 구조 고통을 표현할 수 없고, 타자에게도 표현되지 않을 때, 인간은 상상 속 보호막에 머문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우울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 즉 악의 형태로 굳어진다.
사랑의 가능성 우울의 구조를 흔드는 것은 타자의 무조건적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지만, 함께 머무는 방식으로 상상력을 다시 열게 한다.
존재의 인정 진정한 회복은 "살아 있어도 괜찮다"는 존재의 수용, 말 없는 인정에서 비롯된다. 말이 아니라 응시와 기다림, 함께 있음으로 전달된다.
민주주의의 조건 민주주의는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라, **존중받는 존재로 ‘인정받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너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응시가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예술의 역할 예술은 고통을 치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 앞에서 머무는 방식으로 악에 저항하고, 상상력의 열림을 회복하는 출구를 상상하게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철학 에세이는

  •  영화는 형식이고,
  •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그 형식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심층 구조입니다.
  • 그리고 지금 쓰는 이 글은, 그 심층 구조에 대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유로서, 감정으로서 응답하는 글입니다.
  • 철학자들의 사유가 너무 추상적이지 않고 실제 독서 체럼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 하이데거, 레비나스, 파스칼... 이 이름들은 처음엔 저에게 장벽이었습니다. 하지만 뤽 다르덴은 이 철학자들의 언어를 아이의 눈빛으로 번역해주었습니다. 

 

에피그래프

“인간은,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살아남은 존재입니다.”
— 뤽 다르덴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시간의 상처를 건너는 사랑, 그리고 인간의 일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끝으로 다가갈수록 한 사람의 아이였던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트라우마는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치유되지 않은 채 현재를 흔들고, 미래를 얼어붙게 만드는 시간의 파편입니다. 그래서 다르덴은 말합니다. “트라우마는 인간의 시간을 구성한다.”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이 끊임없이 자전거를 타는 이유도, 그가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미래를 가질 수 없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반복은 상처의 반복이자,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한 본능적 시간의 되풀이입니다. 하지만 다르덴은 묻습니다.

“그 되돌아오는 과거는 단지 고통의 재현일까? 아니면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의 흔적일까?” 그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인용합니다. “아직 누구도 실제로 가져본 적 없는 고향이 언젠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고향이란, 결국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시선, 사랑받았던 기억의 장소, 존재해도 괜찮다고 말해졌던 시간입니다.

아이의 출현은 어른의 죽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다르덴은 말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어른의 자리를 가져가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자리 바꿈이 아닙니다. 어른이 자신의 자리를 아이에게 내어주는 행위, 곧 사랑을 다시 건네는 행위,삶의 대물림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한때 사랑받았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통해 나를 잊고, 내 존재를 넘어서는 법을 배웁니다.

예술은 이 모든 시간과 고통과 사랑의 교차점에서 태어납니다. 예술은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르덴은 말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출구는 거창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조금 나누는 시선,
침묵 속에 함께 머무는 사람, 다시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무엇. 그것이 예술이 건네는 기도이자, 다르덴이 ‘인간의 일’이라 부른 삶의 윤리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세 장을 읽으며, 예술은 고통을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한 줄의 문장을 오래도록 붙들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과 문장이 머리를 스쳐 갔지만, 결국 가슴에 남은 것은 한 아이가 내게 묻는 그 질문이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나는 오늘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는,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일에 대하여는 끝으로 갈수록 한 사람의 아이였던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어른이 되어가는 삶의 대물림을 보여줍니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를 흔들고 미래를 닫아버리는 시간의 파편입니다. 하지만 다르덴은 말합니다. "되풀이되는 고통의 시간에도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고향입니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던 시선, 사랑받았던 기억, 존재해도 괜찮다고 말해졌던 시간. 

니체, 하이데거, 카프카, 레비나스, 스피노자…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을 더듬으며 저는 이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엔 너무도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사유는 말없이 묻는 한 아이의 눈빛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다르덴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술로 남겼습니다. 예술은 고통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고통이 우리의 것임을 잊지 않게 해줍니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며 매일같이 해내야 하는 인간의 일입니다.

 

독자 노트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느낀 점은, 다르덴이 카메라 너머로 하고 싶었던 말이 단지 사회적 메시지나 윤리적 경고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지 마십시오.”
예술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을 함께 느끼기 위해 남겨진 언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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