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인중개사의 영화글쓰기

영화 속 엄마의 방 <다섯 번째 방>

by savusi(사붓이) 2025. 7. 29.
반응형

<다섯 번째 방> 은 전찬영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본인의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30년간 시댁살이를 하며 평생 자신만의 방을 가져본 적 없는 엄마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담아냈습니다. 
 

 

 
수원 미디어센터 정기 상영하는 독립영화 기획전 '인디한 편'으로 <다섯 번째 방>을 관람했습니다. 예고편을 보면서 공감이 되는 지난 날의 기억이 스쳤습니다. 이혼할 무렵 심리상담을 받을 때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편안하게 머무를 공간이 없다고 했을 때 상담사께서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는데 수용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다투고 새벽 3시 집 밖은 별이 총총한데 어디에도 발길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막막한 심정으로 자동차를 서툰 운전으로 처음 달려 본 도로를 헤매다가 유턴을 못해서 수원 지역을 벗어나 화성 어딘가까지 가서야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찬영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뿐만 아니라 각본, 촬영, 편집, 심지어 배우(출연)까지 직접 맡아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진정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단편 다큐멜터리 <바보아빠>(2014), <집 속의 집 속의 집>(2017)에서도 자신의 가족을 카메라에 담은 경험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방>은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대상과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엄마 김효정 씨는 30년 넘게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남편, 자식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전업주부로 20년을 살다가 심리 상담사로 일하며 집안의 경제적인 가장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는 깊은 결핍이 있었습니다. 
시댁살이 중 몇 번의 이사를 통해 방을 옮겼지만 그 방들은 항상 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언제든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고 집안일은 여전히 효정 씨의 몫이었습니다.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도 집에서는 며느리이자 아내, 엄마로서의 역활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가 효정 씨가 살고 있는 집의 소유권을 둘러싼 충격적인 발언을 하면서, 엄마는 자신이 이 집에서 평생 얹혀사는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영화는 딸인 감독의 시선으로, 이러한 엄마가 자신만의 안전하고 독립적인 공간, 즉 다섯 번째 방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습니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삶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엄마의 투쟁이자 독립의 기록입니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삶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 시작하는 엄마의 변화를 섬세하게 따라갑니다. 
영화가 다큐멘터터리 장르이고 보니 실감나게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오롯이 존재할 공간이 없었다는 결핍을 혼자가 되어서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감정 부스러기들이 꼬물락거립니다.
 

 

 

멈춤, 삶의 브레이크 - 엄마의 부재

 

혼자가 되고서야 느낄 수 있었던 엄마 효정씨의 결핍에 공감했습니다. 물리적인 방은 가족들의 침범을 받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이혼 후에야 내게도 효정 씨와 같은 결핍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만약 이런 마음을 진즉 알았다면 이혼은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욕구를 마냥 참기만 한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것 또한 이혼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혼이라는 브레이크를 밟은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사실 멈추기를 바랐던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참으면 좋은 날이 오겠지하는 막연함으로 젊은 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삶이 멈춘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간 참고 견뎌온 시간들이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멈춤이 진정한 나의 다섯 번째 방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요. 
영화 속 효정 씨는 물리적인 방이 있었음에도 , 그 공간은 진정한 나만의 방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감각은 주부들이 흔히 경험하는 결핍일 것입니다. 효정 씨의 남편이 멋대로 방을 드나들며 사적 공간의 경계를 허물었던 것처럼 저 또한 비슷한 침해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차라리 세입자라면 돈을 내고 공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곤 했습니다. 효정 씨의 남편이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든 저의 가족들 역시 제가 내 마음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경계를 침범당하는 고충은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밖에서 일하고 돌아와 몸이 지쳐 쉬고 싶을 때조차 "여자가 설거지는 미루지 말아야지" 하는 말로 저의 쉴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그때는 몸이 힘들어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족들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설거지를 미루면 안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상담사는 괜찮다고 했고 그 말은 저에게 신세계에서나 가능한 현실적이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그날부터 설거지를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화를 꾹꾹 참다가 결국 "여자가 설거지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고 본심을 내뱉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이없이 말입니다. 함께 일하고 힘들다면 같이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남편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집안일도 잘 하고, 아이들 교육까지 잘하는 만능 여자를 바랐던 남편에게 저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침해하는 효정 씨의 남편을 보면서, 저의 심리적 공간의 경계를 침해했던 남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효정 씨는 스스로 상담사이자 내담자 역활을 하며 자신을 지켜나갔고, 딸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어 영화까지 만들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지켜야 했습니다. 상담사는 저의 그런 상황을 수용해주는 역활을 해주었습니다. 한 시간의 상담 시간 중 50분 동안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상담을 주 2회 정도 받으면서 남편의 갑작스런 이혼 이야기가 나왔고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남편은 상담사가 잘못된 사람이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저에게 이혼을 요구 했습니다. 저 역시 상담이 잘못되었는지 잠시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고 남편은 그런 공간을 내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살아야 했기에 그를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제 마음에서 그를 놓아야했습니다. 
결이 맞는 영화를 감상하고 감정이 복받치면서 글을 쓰는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 자체가 치유가 되고 한 걸음 내딛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행복 교과서와 버려진 앨범 - 비움과 채움의 역설

휴일 아침, 방정리를 위해 침대와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책꽃이를 청소하다가 [행복]에 관한 책을 들춰보았습니다. [행복 교과서]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에서 발행한 책입니다. 몇 년전 마음치유학교에서 행복수업을 최인철교수님의 커리큘럼의 자료입니다. 이 책은 나, 가족, 친구, 이웃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행복의 요소와 원리를 알려주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도와주는 행복교과서입니다. 쭉 훑어보다가 첫장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에서 멈췄습니다. 

동화 파랑새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틸틸과 미틸 오누이에게 요술쟁이 할머니가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술쟁이 할머니는 오누이에게 몸이 아픈 한 여자아이의 행복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 순간 오누이의 신비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오누이는 행복을 가져다줄 파랑새를 찾아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행복의 궁전, 미래의 왕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오누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낙심하며 집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집 안 새장에서 파랑새를 발견한 것이죠. 먼 곳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사실 오누이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예요. 

 

이 책에서 작가가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오누이가 찾아다니던 파랑새처럼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곁엔 이미 많은 행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린이들의 대답에서 공통점은 즐거움이라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즐거운 마음의 모습은 어떨까요?
첫째,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의 즐거움
둘째, 몰입이 주는 즐거움
셋째,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발견하는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책에서 눈을 떼고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비오고 눈내리면서 윗층에서 새어 젖어든 물기 자국이 눈물처럼 말라붙었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미니멀 라이프의 노년의 삶을 살겠노라 이사 전집에서 있던 모든 물건들을 버리고 왔습니다. 옷부터 이불, 새로 구입해서 쓰지도 못한 팩스, 청소기, 당연히 장농이나 에어컨, 방으로 가득했던 책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엄마에게 물려 받은 김치 냉장고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지펠 냉장고, 그리고 몇 가지의 옷과 책만 남겼습니다. 7년을 살다보니 가끔은 청소기는 그냥 둘 걸, 에어프라이, 팩스도 필요한 순간이면 아쉬웠습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수업 중 어릴 적 나의 사진을 공유하는 시간에 가장 난감했습니다. 사진 앨범까지도 모두 버려서 아그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다섯 번째 방> 엄마의 방에는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책, 추억의 작품들, 상담사 일지, 찻잔 등 수많은 물건이 이었습니다. 내가 버린 모든 것들을 <다섯 번째 방> 엄마는 쌓아두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엄마들은 자식들의 사진과 추억의 물건들을 세월이 흘러도 버리지 않습니다. <교토에서 온 편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의 엄마들도 그렇습니다. 한결같이 영화 속 엄마들의 공통점으로 관찰된 모습입니다. 딸들은 또 그런 엄마에게 좀 버리라고 성화입니다. 엄마가 유일하게 내게 남겨 둔 사진 앨범을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사하면서 버린 딸이 되고보니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허전함이 밀려왔습니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걸리적거림을 버린 개운함도 잠시,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스스로 잘라내어 허공에 붕 뜬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건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나는 오히려 엄마의 물건들을 보며 느꼈던 복잡한 감정과 영화 속 엄마들을 통해 나와 엄마를 이해해 가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인 無狀(무상)과 無我(무아)를 통해 물건과 관계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삶을 살면서 문득 엄마의 물건들이 지닌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영화 속 엄마들이 물건이나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쌓아두는 습관은 나의 엄마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카세트테이프 등 엄마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쌓아 둔 엄마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 속 딸들처럼 차마 버리라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사하면서 그 모든것을 버릴 때 혼란스러웠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마음을 실행에 옮겨버린 후의 감정은 홀가분하거나, 시원하거나 섭섭하거나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뭔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엄마가 불필요한 물건을 쌓아둔것은 잘못된거라고 판단한게 실수인가 싶었습니다. 이 느낌은 영화 속 딸들이 엔딩에 가까울수록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장면을 보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나도 엄마를 이젠 이해할것 같은데 내가 잘못한거 같은 이 죄책감과 비슷한 모양한 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내면에서 묻는 자아의 정체는 말랑해진 가슴의 소리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가슴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공감 속에 말랑해진 가슴이 묻는것입니다. 정말 이럴때는 드라마의 삼순이처럼 심장을 딱딱하게 굳히고 싶어집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지 못한 채 발이 먼저 움직였고, 영화를 통해 가슴이 이제야 반응하는 중입니다. 
온라인 수업에서 어린 시절 사진을 공유해야 했을 때, 사진이 없어서 난감했던 경험은 큰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사진을 버린 행위가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 생각을 억누르며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다독였습니다. 상처투성이 어린 시절과 내 의지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남편과 자식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던 과거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끊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진들을 버렸고, 이제 그 마음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함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다시 상처를 들여다보고 직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듯 아픔을 마주하며 치료하면서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후회는 그렇게 따뜻한 봄날의 햇살처럼 마음을 비추었습니다. 그 시절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는 당연한 진리에 머리를 숙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아이들의 어린 시절까지 버렸던 행위는 내가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이걸 받아들이고 나니 어린 날의 즐거움이 기억나기 시작했습니다. 후회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함으로써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어린 날의 고통을 비우고 행복교과서로 채운 책꽃이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