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쟈키 하야오 감독은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시작된 세대였습니다. 공습과 폐허, 전후의 재건과 경제 성장, 그리고 버블 경제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성장과 상실의 변곡점에 서 있던 일본인입니다. 그는 비행을 꿈꾸며 정령과 숲, 바다와 도시 사이의 경계에서 성장하는 존재들을 그려낸 예술가입니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존재의 근원과 상처 구원을 그리는 철학적 회화입니다.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은 오랜 휴식 딸을 보며 받은 영감으로 새롭게 그려낸 세계입니다. 이름을 잃고 다시 찾기까지의 여정, 단순한 플롯 안에 일본의 전통 정령 신앙과 불교적 사유, 그대 이후 자본주의 문명의 욕망 무엇보다 존재라는 주제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미챠자키 하야오는 그 시대를 살아온 이가 일본이라는 삶의 전통과 상처를 품고 그려낸 집요한 세계입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였기에 폭력과 파괴에 대해 강한 윤리적 사상을 가졌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하울의 움직이는 성>, <붉은 돼지>등에서 반전의 세계관을 일관되게 펼쳤습니다. 그의 세계에는 전쟁 영웅, 파괴의 미학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아이, 약자, 상처 입은 존재들만이 있습니다 .
그는 또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입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의 신과 인간의 대립,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강의 신이 오물신으로 변한 사연은 그가 환경 파괴를 가장 심각한 인간의 죄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소녀들을 주인공을 삼았는데, 치히로, 키키, 나우시카, 산, 포토.. 등 그의 주인공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과 마주하고 성장을 향해 걸어갑니다.이는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주체성과 돌봄의 윤리가 깊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그를 페미니스트로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의 그러한 철학과 미학이 정점에 도달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와 종교, 자본주의와 정체성, 성장과 회복을 모두 아우르는 시적인 거장 애니메션이자 한 일본인이 동시대인과 후세에게 남긴 깊은 통찰의 마장전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닌 악을 변화하는 상태로 포착합니다. 가오나시는 탐욕에 휘말렸다가도 치히로의 단호한 거절 앞에서 탐욕을 배설하여 회복하고 유바바조차도 악의 화신이 아닌 자본과 통제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냅니다. 치히로는 그 틈에서 자신의 이름, 자신의 기억, 그리고 타자와의 연결을 잃지 않고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는 자가 됩니다. 환상적인 모험담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인 명작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그 철학성과 회복의 미학에 있습니다 .
1. 신사와 사찰의 혼불 미장센, 그리고 정체성을 잃은 이들의 내러티브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미노유아' 직역하면 신들의 목욕탕입니다. 전통적인 일본의 온천 료칸처럼 보이지만 그곳을 찾는 손님들은 비, 강, 숲, 바다, 자연을 상징하는 신령들입니다. 그들은 더러움과 오염을 씻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고 그들을 맞이하는 유바바는 온갖 속세의 욕망과 거래의 마녀로 군립합니다. 오물신은 원래 '강의신'이었으나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뒤덮여 오물신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개구리, 두꺼비 모습의 손님들은 전통 일본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가이도'나 요괴적 신들의 형상입니다. 심지어 유바바에게 일을 부탁하는 큰 손님들은 비, 폭풍, 산, 식물신의 특성을 상징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이름 없는 손님 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동물, 괴수, 자연을 상징하는 신비한 형상으로 묘사되며, 대사도 거의 없고, 신분이나 정체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신토(神道) 세계에서는 신은 사람의 모습만이 아니라 돌, 물, 바람, 나무, 구름, 심지어 요괴처럼 생긴 것들에도 깃든다고 여깁니다. 터널의 입구와 터널안 들판에 군데 군데 있는 석상은 아라시야마의 '오타기 넨부츠지'의 1200개의 나한 불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이 돌불상의 이미지가 영화의 욕탕 속 신들의 얼굴 없는 다양성과 겹쳐집니다. 일본 근대문명 이전의 세계관과 자연과 영혼이 함께 숨쉬던 신토적 우주가 현대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진 신화적 순례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영화가 오래도록 사랑 받을 수 있었던건 본질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임을 미장센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 교토 사찰의 이미지와 이 영화가 겹쳐지는 순간들을 떠올려볼까요?
도리이 (경계의 문) | 치히로가 처음 들어서는 신의 세계 |
오타기 넨부츠지의 수많은 돌 불상 | 욕탕에 들어오는 신들의 다양한 얼굴 |
오쿠노인의 무언의 침묵 | 기차에 앉아 조용히 가는 가오나시 |
금각사의 반영 | 물 위에 떠 있는 욕탕의 이미지 |
에이칸도의 부드러운 정원 | 제니바의 따뜻한 집, 실내의 조명과 평화 |
(2) 구체적 장면 예시
- 거대한 말 없는 손님 : 얼굴 없이 느릿하게 걷는 손님 중 일부는 고대 일본의 산신이나 폭풍신을 연상케하는 덩치 큰 형상으로 등장합니다.
- 식물 덩굴 형태의 손님 : 정확히 식물신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덩굴처럼 몸이 흐물흐물한 손님, 버섯 같은 머리, 풀이나 이끼같은 옷을 걸친 형상들이 보입니다. 이는 산림, 자연의 정령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 오물신 등장 시 손님들의 반응 : 오물신이 들어올 때, 온천장 전체가 소란을 피웁니다. 이때 다른 신들이 두려움과 예의를 함께 보이며 그 존재가 보통의 손님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즉, 등급과 위계가 존재하는 신들의 세계라는 설정입니다.
미아자키 하야오는 2002년 로저 이버트와의 인터뷰에서 Ma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의도적인 정지와 공백을 통해 정령적 감각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의미를 전달한바 있습니다. 오물신 장면은 자연환경 파괴와 잃어버린 정령성을 은유적으로 그린 대표적인 예입니다.
"Ma(間)”란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에서 정적 장면, 즉 아무도 말하지 않고 움직임이 거의 없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넣었습니다. 그 공백은 정령의 기운, 자연의 숨결, 인물의 감정이 스며드는 시간이며, 관객이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주는 공간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 애니메이션은 거의 숨 쉴 틈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Ma라는 것이 있습니다. 침묵의 순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물이 똑똑 떨어지는 순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순간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3)《센과 치히로》 속 Ma의 예시
- 치히로가 기차를 타고 가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
- 하쿠와 하늘을 나는 순간, 말을 멈춘 침묵
- 가오나시가 욕망을 배설하며 조용히 사라지는 장면
이런 ‘고요’는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영혼이 쉬는 시간입니다.
이 개념은 일본의 전통 예술 (노, 가쿠키, 스미에, 정원 등) 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철학입니다.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는 그 정적 장면들 속에서 관객은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정적의 미학은 얼마전 다녀온 교토사찰순례에서 료안지(용안사)의 정원의 경험과 닮아 있습니다. 15개의 돌 중 14개만 보이고 언어느 방향에서도 한 개의 돌은 보이지 않는 정원에서의 고요한 정적의 순간, 그날 비가 비가 내렸습니다. 돌과 모래위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비어 있는 시간에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호흡 명상을 했습니다.
일본의 정원처럼 영화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예술이 아니라, 무엇을 비워내며 느낌이 듭니다.
(4) 혼불의 미장센 – 신과 인간의 공간 구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문을 통과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비밀스러운 터널, 붉은 도리이(鳥居), 황혼의 기찻길, 그리고 료칸 이 모두가 경계입니다. 인간과 신의 세계를 나누는 물리적 경계이자 동시에 현실과 무의식,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의 장치입니다. 영화의 미장센중 하나인 료칸은 전통 일본의 신사 건축과 불교 사찰의 양식이 혼재된 형태를 띱니다. 이 장면은 교토 사찰을 경험하면 특이한게 아닙니다. 일본의 혼불은 오랜된 전통이고 사찰이지만 겉모습이 신사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고야산의 단조가란(壇上伽藍)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고야산의 시초, 쿠카이가 처음 법당을 세운 수행의 원점이자 가장 오래된 중심 구역입니다. 그러나 첫인상은 의외였습니다. 붉은 오렌지색 기둥과 금빛 장식, 뾰족하게 뻗은 지붕 선들은 사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에는 어딘가 이질적인 떨림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찰과 신사의 경계가 흐려진 공간. 불교의 중심지에서 신도의 색을 목격한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질문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억압 속에 많은 사찰들이 신사 형식으로 외형을 바꾸어 살아남아야 했고, 단조가란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풍경의 색채는 과거의 상흔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단조가란은 진정한 불교의 색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압력 아래 위장한 수행처였습니다. 신도 건축의 색채를 입고, 불교의 중심이 된다는 역설. 불교와 신도는 이곳에서 껍질과 속, 외피와 중심으로 엇갈려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교토사찰순례 - 고야산 쿠카이(동해) 선사
한 걸음 한 걸음, 한 숨마다 내 안의 침묵을 비추는 순례의 여정 3박 4일의 기록 첫 날 고야산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던 진실한 마음을 꺼내어 보는 여정, 체험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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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칸 형태의 유바바의 온천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신도와 불교가 뒤섞인 혼불의 상상세계이며 그 안에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신도의 정령 개념과 정화와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내면 사상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미야카키는 이 작품에서 일본 고유의 신화적 세계관을 시각적 풍경으로 체화해냅니다. 온천은 정화의 장소이자 타자의 흔적을 씻는 공간, 욕망을 씻는다는 것은 다시금 순수한 존재로 돌아가는 의례를 뜻합니다. 이곳에 들어온 신들은 인간이 버린 고철과 오물을 뒤집어쓴 채 치유를 기다리는 상처 입은 존재들입니다.
(5) 모티브 – 이름을 잃은 자의 여정
영화의 중심 모티브는 이름을 빼앗긴 존재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하쿠는 진짜 이름을 잊었고 치히로는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자기 정체성을 잃는 것이며 이름을 되찾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치히로가 이름을 잃고 부모마저 돼지로 변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은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억, 그것은 존재를 붙드는 마지막 줄기, 치히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함으로써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고전적 영웅서사의 구조를 따릅니다.
일상의 세계 - 호출 - 거부 - 멘토의 등장 - 경계의 문 - 이계 진입 - 시험 - 절정 - 보상 - 귀환 - 귀환이라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 구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미국의 비교신화학자이자 인문학자입니다.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에서 고대 신화부터 현대 영화까지 인류 보편의 이야기 구조를 분석했고, 그 결과 도출한 서사 원형이 바로 **‘영웅의 여정(The Hero's Journey)’**입니다. 이 구조는 루카스의 <스타워즈>,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심지어 디즈니의 <모아나>, 픽사의 <업>까지 현대 영화의 심층 구조에 뿌리처럼 살아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얼핏 보기에 이 구조를 따릅니다.
평범한 소녀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라는 이계로 들어가 자신과 부모의 이름을 되찾고 마침내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서사입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 구조에 반전을 가합니다. 전통적인 영웅 서사 위에 미챠자키적인 사유의 색채를 더합니다. 치히로는 검들 들지 않습니다. 괴물을 물리치지도 않고 전쟁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방식은 침묵과 기억, 신뢰와 행동이라는 미야자키식 내면의 전투였습니다. 판타지 영화이면서 이해와 정와, 기억과 자각이라는 내면적 여정을 통해 치히로의 윤리적 모험을 보여줍니다.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견디고, 받아들이고, 끝내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치히로는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중심을 지키는 인물로, 미야자키적인 영웅 이야기로 완성됩니다.
2. 가오나시 – 외로움의 형상화
욕망보다 외로움 가오나시는 조용한 존재였습니다. 치히로는 도리이 다리에서 처음 마주쳤고 비를 맞고 있는 고오나시를 위해 문을 열어둡니다. 문이 열리고 관계가 생기자 외로움은 욕망으로 부풀어오르고 결국 삼키고 파괴하는 괴물이 되어갑니다. 그건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가 사랑을 잘 몰라서 관계를 망치는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도리이 너머의 세계에 들어 온 가오나시는 외로움이 욕망으로 변질되고 배설을 통해 비워지면서 사랑을 깨우는 존재가 됩니다. 가오나시를 통해 현대인의 결핍된 관계와 소유와 유혹의 심리를 사유하게 되는 여정을 따라가보겠습니다.
(1) “가오나시”란 누구일까?
이름 그대로 '얼굴 없음' 그 어떤 표정도, 성격도, 정체성도 없는 존재입니다. 처음엔 욕탕 앞에서 비를 맞으로 치히로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문을 열어 두는 치히로의 친절에 가오나시는 욕탕 안으로 들어와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저 조용히 관찰하고, 관심을 갈구합니다. 그러다 치히로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자, 그녀를 ‘따라하고’, ‘도와주고’ 싶어해요. 하지만 사랑 받고 싶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외로운 그림자. 관심을 받지 못하자 금을 만들어주며 사람들의 욕망을 끌어들이고 점점 탐욕스럽고 괴물스러운 존재로 바뀌어버립니다. 가오나시는 먹어요. 사람을, 목욕탕의 하인을, 음식을, 금을, 심지어 자신의 외로움까지.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아요. 왜냐면 그는 **“비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누군가가 되어보려는 욕망 그 자체이자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은 우리들의 그림자입니다. 사실 가오나시는 우리 마음이 가장 외롭고 지쳐 있을 때 잘 안보이지만 계속 곁에 머무는 감정입니다. 어둠 속에서 말 없이 스윽 나타나는 검정색의 묘한 그림자, 움직임은 느릿하고 표정은 비어있고 존재는 공허한데 어쩐지 마음이 서늘해지고 동시에 짠한 느낌도 듭니다. 그 존재가 가오나시입니다.이 존재를 지금 처음 마주했을때 섬뜩함, 외로움, 안쓰러움이 들었는데 마음에 그림자 감정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독,
어디에 있는지 모를 나의 목소리, 욕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미묘한 허기… 가오나시는 말이 없어요. 그저 따라오고, 먹고, 변해요. 하지만 결국엔 자기 자리를 찾아갑니다.
가오나시는 치히로에게 뭔가를 주려고 애쓰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 시작은 마치 외로운 아이가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선물을 내미는 모습과 같습니다. 치히로가 유바바의 욕탕에서 일을 할때 가오나시는 목욕 티켓 여러개를 마법으로 만들어 그녀에게 건넵니다. 그것을 뿌리치자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그것으로 오물신을 정화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거절받은 가오나시가 계속해서 금덩이를 만들어 욕탕 사람들에게 주고 음식을 받아 먹고 그들을 집어 삼키며 괴물처럼 부풀어오릅니다. 그런데 치히로는 그가 금을 줘도 받지 않습니다. 그가 무섭게 변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가오나시는 "줄게, 그러니까 나를 받아줘" 하지만 치히로는 받지 않습니다. 이 교차는 욕망의 세계에서 중심을 지키는 치히로와 외로움에 길을 잃어버린 가오나시의 대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치히로만이 가오나시를 다르게 대합니다. 가장 외로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치히로는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벌하지도 않고 곁에 있게 됩니다. 기차안에서 생쥐로 변한 보우 아기와 새 그리고 가오나시가 앉아 있는 그 Ma의 순간 영화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가오나시와 치히로의 교차는 욕망과 중심, 고독과 관계에 대한 미야타키의 깊은 성찰을 드러내주는 핵심 장면입니다. 금을 주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태도, 관계 맺기의 방식, 말 없이 존재를 인정하는 윤리 같은 주제들이 이 장면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Ma는 시간의 틈, 공간의 결, 마음의 숨을 담는 여백입니다. 그 여백 속에 치히로는 흘러들어가고 가오나시는 마침내 고요히 함께 머무를 줄 아는 존재로 변해갑니다. 이건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정화의 서사입니다.
가오나시는 친근감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애정은 갈망하면서도,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아기 시절 엄마와의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맺지 못해서 정서적으로 깊은 골을 안고 자란 어른처럼요. 엄마가 아기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해주지 못하면 아니는 마음 깊은 곳에 결핍된 틈을 품게 됩니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좌절될까 두려워 투정도, 기대도, 매달림도 아닌 거리두기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을 향한 애착은 분노와 집착으로 비틀어집니다. 욕탕에서 치히로에게 선물하듯 마법 티켓을 내밀고 그녀를 위해 황금을 만들어내고, 또 사람들을 집어삼키기까지 했던 가오나시의 모습은 괴물적 욕망이기 보다 애정에 실패한 자의 슬픈 표현일 수 있습니다. 가오나시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은 배운적이 없는 사람의 외로움을 닮았습니다. 그의 외로움은 거대하게 부풀어오르고 치히로만이 그 마음에 이름을 붙여줍니다.
(2) 가오나시의 마음이 닿은 순간
욕망의 존재가 되어가는 가오나시는 자신이 가진것을 무작정 내어줌으로써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카운터 앞에서 목욕 티켓을 받지 못하는 치히로를 위해 옆에서 슬쩍 한 개를 건넵니다. 치히로가 기뻐하며 고맙다고 하자 그는 다시 치히로에게 욕탕 티켓 여러 장을 건네지만 치히로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가오나시가 억지로 주려고 하자 뿌리치는 치히로, 목욕 티켓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바로 그때 자신이 씻으려고 준비한 탕안에 오물신을 안내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욕 티켓이 필요해져서 바닥에 떨어진 그 티켓을 정화하는데 사용합니다.
치히로는 가오나시의 마음에서 나온 하나의 티켓을 수용함으로써 욕망이 아닌 관계의 가능성, 소유가 아닌 존재의 전달을 이룹니다. 오물신은 잡동사니를 모두 끄집어내고 나서야 강의 신으로 돌아갑니다. 이 장면은 가오나시에게도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하는 발단입니다. 모든것이 나에게 나와 나에게 돌아알아 수행한다는 정진할 때마다 기도하는 수행문이 떠올랐습니다. 강의 신과 가오나시의 이러한 연결에는 치히로의 필요한 만큼 수용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오나시가 건넨 목욕 티켓으로 오물신의 정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강의 신으로 돌아가며 고맙다며 초록 경단을 주고 떠나는데 그 경단은 후에 하쿠와 가오나시가 필요이상 먹은것을 배설하거나 토해내는 역활을 합니다. 이 영화의 깊은 내러티브는 치히로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연쇄적 돌봄의 구조 안에서 완성됩니다.
3. 두 얼굴의 세계 - 유바바와 제니바
욕탕을 지배하는 유바바와 먼 숲 속에 은거한 제니바는 쌍둥이 자매입니다. 외형은 같지만 내면은 정반대입니다. 욕망과 권력, 통제와 금력의 세계를 상징하는 유바바는 이 계의 절대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자식조차 집착적으로 보호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반면 제니바는 유바바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치히로와 가오나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보우와 새를 작은 쥐와 작은 새로 만들어 사랑스럽게 대합니다. 그녀는 지배보다 관계와 환대의 존재 욕망보다 회복과 귀환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쌍둥이 자매의 등장은 한 인물 안에 내재된 이중성의 분열입니다. 소유하려는 마음과 존재를 바라보는 마음이 치히로와 주변 인물들의 여정 속에서 충돌하며 조금씩 조화를 찾아갑니다.
하쿠는 이 두세계 사이에 갇혀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유바바의 조력자이고 동시에 그녀의 권력에 매여 자기 이름을 잊고 마법의 세계에 복속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제니바의 세계에서 그는 다시 코하쿠강의 본래 이름을 회복하고 치히로와의 연결 속에서 스스로를 되찾는 회복의 여정을 밟게 됩니다. 이렇듯 영화는 환상적인 쌍둥이의 설정을 통해 깊이 내면화된 인간의 분열된 자아, 그 자아의 갈등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유바바와 제니바의 등장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치히로와 하쿠의 이름을 찾는 여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유바바의 방에서 엿듣게 되는 전화 통화와 아기 보우와의 만남으로 요바바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떡하면 좋으냐, 그 녀석의 정체는 가오나시야. 얼굴 없는 요괴 돈에 눈이 멀어서 그런 손님을 들이다니 내가 갈때까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카펫이 더러워졌어. 하쿠를 처리해라. 이제 그 애는 쓸모없어. "
통화를 마친 유바바는 아기 보우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보우는 치히로에게 놀아달라고 팔을 붙잡고 떼를 쓰지만 뿌리치고 하쿠에게 다가갑니다. 밖은 병균에 옮는다고 나오지 않는다던 아기 보우가 나와 치히로에게 놀아달라고 울어댑니다. 그때 치히로를 따라 들어온 하얀 종이 한 장이 제니바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아기는 그 모습을 보고 엄마라고 부르지만 제니바는 보우를 작고 귀여운 생쥐로 욕망을 상징하던 얼굴 삼둥이를 아기보우로 변신시킵니다. 그리고 하쿠를 안고 있는 치히로에게 네 덕분에 구경 잘했다고 하며 하쿠에 대해 말합니다.
"용은 다 착하지, 하지만 어리석은 욕심쟁이 동생이 내 도장을 훔치도록 시켰어."
"내 도장에는 강한 마법이 걸려 있어 이미 늦었다."
이 장면은 하쿠가 복종했던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 제니바라는 존재를 통해 치히로가 다른 방식의 세계를 마주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유바바의 집착과 통제, 제니바의 유연함과 환대가 뚜렷하게 대비되며 이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서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그 세계의 균열을 지나 자신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하쿠는 본래 강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빼앗기고 유바바의 수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바바의 명령으로 제니바의 인장을 훔치다 중상을 입습니다. 유바바의 욕망이 그를 병들게 한듯 하쿠는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 치히로는 하쿠를 살리기 위해 초록 경단을 먹입니다. 이것은 오물신이 정화된 강의 신으로 돌아가면서 고맙다고 준 회복의 약입니다. 하쿠는 그 경단을 먹고 그 마법이 걸린 약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하쿠가 훔친 도장을 돌려주기 위해 제니바를 찾아가는 기차를 탑니다. 치히로는 하쿠를 살리기위해 직접 제니바를 찾아가서 도장을 돌려주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것입니다.
제니바는 적대적 존재처럼 소개되지만 치히로는 그녀를 만나러 화해와 정화를 위해 스스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치히로의 주체적 행동이고 성장의 징표입니다. 제니바는 하쿠를 나무라지 않고 아기와 작은새 그리고 치히로를 돌려보냅니다. 욕망과 분열이 아닌 세계의 반대편, 즉 치유와 귀환의 공간입니다. 이 집에 가오나시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을 찾아냈고 제니바의 일을 돕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치히로와 이별은 하게 되었지만 스스로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편 유바바는 아기를 잃고 치유된 하쿠로부터 아기를 데려올테니 치히로와 부모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을 받습니다. 동생을 이기고 싶어하지만 아기가 없는 유바바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4. 이름을 잃고 다시 찾는다는 의미 - 불성을 자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는 이름을 잃고 다시 찾는다. 즉 본래의 성품을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치히로는 유바바에게 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습니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타인의 언어와 사회의 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망각의 상태입니다. 하쿠는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고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과정은 자신 안의 불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세상 모든 형상이 허상일지라도 불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불성은 어디선가 멀리 찾아야 할 신비가 아니라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지만 잊혀졌을 뿐입니다.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고 부모와 함께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태어난 수행자의 귀환처럼 느껴집니다. 그 여정은 교토의 오쿠노인을 걷던 그 길처럼 한 존재가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고귀한 회귀였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신도의 형식을 입고 있지만 그 뿌리에는 깊고 고요한 불교적 사유가 살아 있습니다. 신사와 료칸, 자연과 정령속의 치히로는 애쓰는 존재라기 보다 이미 그런 마음을 지닌 채로 살고 있는 아이, 부처의 성품으로 거기 있는 아이와 같습니다. 노력이나 수양 이전에 이미 그러한 존재 선지식이나 구도자처럼 되어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청정하고 본래 밝은 성품을 지닌 소녀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세계를 정화하고 변화시키는 존재 치히로는 수행자가 아니라 이미 본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존재, 불교적인 이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1) 치히로(千尋, ちひろ)의 뜻을 풀어보면요,
🔤 한자 그대로 보면
- 千(센): 천 → ‘천 개, 무수히 많은 것’
- 尋(히로): 히로 → 일본 옛 단위로 ‘길이’,
바닷속 깊이를 재는 데 쓰이던 말이기도 해요.
하나의 히로는 약 1.8미터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곳’을 뜻하는 상징적 단어입니다.
그러니 **치히로(千尋)**는 직역하면
천 갈래의 깊이 혹은 무한한 깊이를 품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여기에 ‘센(千)’이 들어있어요.
극 중에서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에서 ‘尋’을 지워버리고
오직 ‘千(센)’만 남겨두죠.
이건 정말 중요하고, 무섭고도 슬픈 장면입니다.
이렇게 치히로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과 깊이’를 지닌 존재였지만,
센이 되는 순간,
그저 숫자 하나로 줄어든,
노동자 하나의 기호로 전락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3) 불교적 사유와도 이어지는 이 비유
나는 누구인가, 이름은 존재의 껍질 같지만 때로는 그 껍질 안에 바다보다 깊은 정체성의 심연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치히로’는 단순한 소녀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과 고유함을 회복해가는 여정의 이름이에요.
(4) 이걸 ‘하쿠’의 본명과 비교해볼까요?
하쿠의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饒速水小白主)
= **“빠르게 흐르는 강의 신, 코하쿠”**예요.
여기서도 ‘이름’이 곧 정체성이며 자연의 영혼인 거죠.
강의 신의 이름을 잃었을 때, 그는 마법사의 종이 되었고
이름을 기억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강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이름 하나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품은 마음의 우주라는 걸 다정한 이미지들로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불교와 신사의 혼불의 모습이 전형적인 이미지로 섬세하고도 상징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치히로라는 이름은 곧 부처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유바바는 아이들의 이름을 빼앗아 통제합니다. 기억의 삭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 불성, 참나, 고유한 자리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무수한 깊이를 지닌 존재 영겁의 바다처럼 깊은 깨달음의 심연을 품은 사람이라면 이름을 잃었다고 해서 불성을 잃게 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눈으로 볼 수 없는 불성을 이름으로 형상화하여 이미 불성 자체인 치히로를 드러내는 작품이었습니다. 부처의 또 다른 이름 치히로 , 부처는 때로 다르마, 진리, 비움, 연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치히로는 이 세상에 온갖 혼란과 번뇌를 겪으면서도 무한한 깊이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즉 중생이자 부처의 가능성을 함께 지닌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긴다는 건 불성을 잊고 삼계의 욕망 속에 빠지는 일이고, 이름을 되찾는다는 건 다시 자기 안의 부처를 자각하는 일. 그 과정이 가오나시의 비움, 하쿠의 기억 회복, 제니바와의 차 한잔, 그리고 마지막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는 순간까지 영화 전체에 불교적 깨달음의 여정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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