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는 내 삶의 영역에 타인을 정중히 받아들이고 고통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윤리적 태도입니다. 이 드라마는 모은과 윤수의 연대 사이에 응시의 시선을 통해 인간이라면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심리 드라마입니다.
자백의 대가의 장르 규정
형식적 정체성
- 형식: OTT 드라마
- 회차: 12부작
- 공개 방식: 넷플릭스 시리즈
즉, 한 번에 소비되는 영화적 완결물은 아닙니다. 대신 분절과 반복, 지연과 축적을 전제로 한 이야기 구조를 갖습니다.
장르적 성격
이 작품은 한 가지 장르로는 잡히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익숙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미끄러집니다.
- 기본 장르: 범죄 스릴러
- 핵심 톤: 심리 드라마
- 하위 장르: 미스터리, 복수극
- 정서적 결: 심리적 누아르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심리 드라마입니다.
이정효 연출
이 감독은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대중적 성공작의 메인 연출이지만, <자백의 대가>에서는 그 성취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번엔 사랑 대신 자백을, 감정의 폭발 대신 침묵의 밀도을 선택했습니다. 왜 이 감독은 이렇게 장르가 다른 작품을 오가면서도 말하지 않는 순간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이 슬며시 고개를 듭니다.
이정효 감독은 이름보다 작품의 톤으로 기억되는 연출자입니다. 그는 연출가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이야기와 인물의 호흡을 정확하게 조율하는 방식으로 커리어를 쌓아왔습니다. 대중적 성공을 거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메인 연출을 맡으며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연출 세계는 로맨스의 감정 과잉보다는 인물의 선택과 침묵이 만들어내는 긴장에 더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이 감독의 연출은 장르보다 인물에 먼저 반응합니다. 범죄극에서도 사건을 전면에 세우기보다,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과 말의 간극을 오래 응시합니다. 카메라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음악은 판단을 강요하지 않으며, 편집은 쉽게 결론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빠르지 않지만,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밀도를 획득합니다.
〈자백의 대가〉에서 이정효 감독은 자신이 익숙하게 다뤄온 대중적 정서에서 한 발 물러서, 자백이라는 언어가 인물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차분히 탐색합니다. 이 작품은 감독의 스타일이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이라기보다, 그가 오랫동안 연마해온 연출의 태도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프닝과 엔딩이 응시의 구조를 완성하다
이 드라마 첫회는 관객을 속입니다. 마치 윤수가 주인공인 것처럼, 살인사건이 중심인 것처럼, 법정 스릴러인 것처럼 시작합니다.
실제로는 소해,소망 자매의 감정이 윤수라는 인물을 통과해 형태를 얻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오프닝 결혼식 장면에서 이 자매를 프레임 밖으로 빼놓았고, 흡사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촬영자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들고 행복한 장면을 기록하고 프레임 안에 포함되지 않은 존재이자 프레임을 만드는 자리에 있습니다.
강소해를 첫 회 막바지에야 볼 수 있고 우리는 그녀가 보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시점을 숨긴 이 드라마는 오프닝 결혼식 장면에서 촬영자의 시점으로 윤수의 남편 이기대의 살인 현장으로 전환됩니다. 피로 얼룩진 작업실에서 경찰서에 전화를 하며 울부짓는 윤수로의 연결은 잔인할 만큼 정확합니다. 행복을 기록하던 카메라의 시점이 곧바로 비극을 목격하는 시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때 관객은 윤수의 감정에 이입되기 전에 이미 보는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엔딩에 이르러서야 이 드라마는 숨겨두었던 시점을 꺼내놓습니다. 결혼식 장면이 다시 나오고 이번에는 소해,소망자매가 프레임 안에 등장합니다. 이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시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보는 자가 누구인지 숨기고 윤수의 비극으로 관객을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야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은 사건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상처를 안고 있던 자매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 결과 이 드라마는 매 회차마다 긴장감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프닝에서 소해 자매를 숨겨둔 이유가 그들을 먼저 보여주면 드라마의 긴장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물을 보여주기 전에 시선을 심어 놓고 마지막에야 그 시선의 주인을 드러냅니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소해의 자리에 서서 윤수를 바라보고, 윤수의 억울함에 반응하고 그 감정의 폭주를 끝까지 목격하게 됩니다.
오프닝에서 윤수의 내면으로 곧장 이입되지 않고 먼저 보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자리란 판단의 자리라기보다 증인의 자리에 가깝습니다. 증인은 연민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거리를 유지합니다. 윤수는 비극의 주인공이면서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중의 위치가 이 드라마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장치인 셈입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보는 자가 되는가
첫째, 서사가 아니라 시점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오프닝에서 전환된 장면은 인물의 내면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윤수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왜 울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벌어진 장면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혼식을 기록하는 카메라에서 살인현장의 피범벅의 윤수의 연결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흐름이 아니라 사건을 목격하는 순서입니다. 서사보다 이미 벌어진 세계 앞에 세워지는 느낌입니다. 둘째, 카메라가 누구의 것인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게 결정적입니다. 카메라는 분명 존재합니다. 흔들림, 거리, 프레이밍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촬영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윤수의 시점도 아니고 소해의 존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시점은 누구의 자리인가. 무의식적으로 그 빈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됩니다. 등장인물보다 한 발 뒤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놓입니다.
왜 응시가 느껴지는가
내가 보고 있다고 믿는 순간 사실은 이미 보여지고 있다는 불안의 감각 즉, 응시는 주체가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이 깨지는 지점입니다. 라캉의 응시는 누군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도 아니고,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아니며 감정적으로 강렬한 눈빛도 아닙니다. 소해가 첫 화 마지막 장면인 살인 현장에서 텔레비젼 속 윤수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윤수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울부짓고 있으며, 이 장면은 소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건드리는 언어입니다. 시선은 뒤집히고 소희는 이때 보고 있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안의 감정이 호출된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응시입니다. 라캉의 응시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보통 믿고 있는 구조를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있지만 촬영자는 등장하지 않는 건 주체가 제거된 시선입니다. 엔딩에서 소해 자매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미 어떤 감정의 자리에서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응시의 효과입니다.
응시는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응시는 해결이 아니라 자리의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밝혀져도 우리는 여전히 불편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죄인 관객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캉의 응시가 여기서 작동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를 이미 가진 채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결말이 와도 완전히 끝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는 순간부터 이미 선택을 했습니다.
이 선택들이 쌓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관객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김 빠진 결말처럼 느껴지지만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무죄일 때만 작동합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면 안심하고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미 감정에 반응했고 그 자리에 있었기에 결말은 해방이 아니라 잔여 감정으로 남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적 태도, 연대를 발견하다
말할수록 더 수치스럽고, 더 고통이 되는 것, 여성의 성폭력은 파헤칠 수록 피해자의 노출만이 확대되고 편협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가해가 더해집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다뤘는가의 윤리를 지킨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성폭력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묘사도, 충격을 유도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주인이가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왜 말하기를 힘들어하는지는 회피가 아닙니다. 선택된 침묵입니다.
윤가은 감독은 피해자의 고통을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재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설명하지 않고, 증명하지 않으며, 납득시키려 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왜 말이 닿지 않는지의 환경을 보여줍니다. 청소년기의 성폭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피해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와 가족 안에서 순환하는 정동을 통해 고통이 어떻게 견뎌지는지를 밀도 높게 담아냅니다.
<자백의 대가>에서도 청소년기의 성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을 다루지만 그 고통을 사건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강소해 자매가 겪은 고통의 진실은 윤수의 남편 살인 사건이라는 우회된 서사를 통과해 8회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납니다.
드라마 속에서 강소해, 강소망의 이름이 등장하는 시점도 그 무렵입니다. 그전까지 소해는 모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남편을 살해한 피의자로, 근무하던 치과 의사 부부를 살해 한 사이코패스로 규정된 인물로 윤수와 모은은 같은 교도소에서 마주합니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알아보았는가, 왜 연대했는가?
모은은 동생의 성폭력 사건 이후 동생과 아버지의 자살을 연달아 겪습니다. 모은이라는 이름은 태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중에 길에 쓰러진 여성을 구하고 함께 지내다 코로나로 죽음을 맞이 한 여성이 죽기 전 자신의 이름을 선물한 것입니다.
도움은 바깥에서 건네는 손길이지만, 연대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마음입니다. 도움이 내가 덜어 낼 수 있는 것을 주는 일이라면, 연대는 내 삶의 영역 안에 타인을 정중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겠다는 윤리적 태도입니다. 모은은 바로 이 가치를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 그 기쁨 속에서 모은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해와 모은의 연대는 이 지점에서 드라마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소해가 소망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처벌이 정의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복수를 결심했을 때, 모은은 그녀를 자신의 삶 안으로 들입니다. 소해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입니다. 이 연대는 모은과 소해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윤수와의 연대로 이어집니다.
연대를 선한 행동이 아니라 삶의 경계를 열어 타인을 맞이하는 윤리적 결단으로 정의했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뛰어난 점입니다.
모은이 살인 현장에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윤수의 외침에 응답하는 순간, 이 드라마의 윤리는 비로소 서사가 됩니다. 그 외침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호출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모은은 윤수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윤수의 남편을 자신이 죽였다고 법정에서 자백합니다. 이 장면으로 연대는 완성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건 진실이 흥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언니의 절실함이라는 모은의 언어는 윤수에게 설득이 아니라 요구입니다. 모은이 윤수에게 요구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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