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를 보던 어느 순간, 소리에 사로잡혔습니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인물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데, 그들의 대사는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빈 화면과 또렷한 목소리 사이의 어긋남은, 보이지 않음 속에서 오히려 존재가 더욱 두드러지는 역설처럼 느껴졌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를 비추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을 글로 표현하려니 막막했습니다. 감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밖에서 들리는 이 소리는 무엇일까?” 그 작은 물음은 오프스크린이라는 영화 사운드를 경험하는 길로 이끌었습니다. 사운드의 구분은 관객이 어떻게 이야기를 듣고,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며, 어떤 깨달음을 체험하는지를 보여주는 열쇠였습니다.
이 글은 그 체험의 기록입니다. <경주>에서 사운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무상과 무아, 공의 사유를 체험하게 하는 수행의 도구로 작용합니다. 장률 감독이 어떻게 사운드의 전통적 질서를 흔들어 관객을 자기 반영적 체험으로 이끄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차 – <경주>와 영화 사운드의 불교적 해석
소리의 영화
- 문제의식
- 영화 <경주>를 보며 느낀 소리의 독특한 사용
- 불교적 사유(무상, 무아, 공)와 영화적 표현의 접점
- 기존에 알던 영화 감상 방식(줄거리·장면 중심)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움 → 사운드 이론을 통해 풀어내려는 시도
- 목적.배경
- 미셸 시옹(Chion)의 사운드 구분: 온스크린, 오프스크린, 앰비언트, 이터널, 온 디 에어, 다이제틱
- 이 구분이 단순 분류를 넘어 내러티브 전달과 예술성 발현을 설명하는 틀이 됨
보여줌과 보여주지 않음의 미학
1. 온스크린 사운드 – 언어의 허망함
- 일반적 기능: 프레임 안, 대사 중심, 정보 전달
- <경주>: 회식 자리 대사가 내러티브와 무관 → 잡음처럼 처리
- 불교적 해석: 언어·학문은 결국 허망, 말은 있으나 의미는 공
2. 오프스크린 사운드 – 부재 속의 존재
- 일반적 기능: 프레임 밖, 보조적 감정 전달
- <경주>: 주방 신의 대사 = 오프스크린이지만 상층 위로 → 부재의 존재를 드러냄
- 불교적 해석: 색즉시공(色卽是空), 존재와 부재의 동시성
3. 앰비언트 사운드 – 외부의 내면화
- 일반적 기능: 풍경·잡음, 하층 위, 감정적 배경
- <경주>: 물소리·풍경소리·옆방 잡음이 단순 배경이 아니라 내면의 감각을 드러냄
- 불교적 해석: 연기법(緣起法), 외부와 내부는 둘이 아님
4. 인터널 사운드 – 환상과 무아
- 일반적 기능: 내면의 소리, 상상·회상, 상층 위
- <경주>: 최현의 상상과 환상 장면에서 외부 소리가 내면으로 들어옴
- 불교적 해석: 무아(無我), 내면과 외부 경계의 붕괴
5. 온 디 에어 사운드 – 자기 반영적 질문
- 일반적 기능: 라디오·전화·TV, 층위 자유롭게 이동
- <경주>: 옆방 술 취한 이의 “잘 보셨습니까” →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순간
- 불교적 해석: 깨달음의 화두처럼, 영화가 스스로를 반영
6.넌다이제틱 사운드 – 공의 선언
- 일반적 기능: 내레이션·배경음악, 내러티브 바깥의 직접적 정보·감정 전달
- <경주>: 마지막 암전 뒤 노래 “텅 빈 마음으로 텅빈 방을 보네”
- 불교적 해석: 공(空)과 무상(無常)의 직설적 체험
사운드로 체험하는 空(공)
- <경주>의 사운드 전략
- 여섯 구분을 전복하고 섞음으로써 관객에게 외부/내부, 현실/환상, 존재/부재의 경계를 흐리게 만듦.
- 그 자체가 불교적 사유와 통한다.
- 불교적 체험으로서의 영화
- <경주>는 내러티브 영화가 아니라, 사운드를 통해 공(空)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수행적 예술.
- 의의
- 영화 사운드 이론과 불교적 해석이 만나는 접점.
- 앞으로의 영화 감상 글쓰기에 확장 가능한 틀.
- 영화적 현실과 불교적 사유의 결
소리의 영화
불교에서 업(業)은 행위가 남긴 흔적이고, 인연(因緣)은 관계의 망 속에서 존재가 형성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인물이 화면에서 사라졌는데도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가 공간에 남긴 업의 흔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관객은 부재한 인물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를 통해 여전히 그와 관계 맺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연의 체험입니다.
영화의 소리는 정보와 감정을 나누어 전달하면서 각각의 소리 유형이 독립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 사운드가 지닌 미학적 가치입니다. 영화에서 소리는 실제로는 스피커에서 나오지만, 관객은 그 소리를 영화 속 세계의 어떤 위치에서 나는 소리로 인식합니다. 영화의 사운드는 ‘관객이 그 소리를 어디서 난다고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경주>에서 윤희와 최현의 대사는 스피커에서 나오지만, 관객은 프레임 밖 너머 공간에서 발생한 소리로 인식합니다. 사운드의 사용에 있어 기존 내러티브 영화의 관습을 비껴갑니다. 특히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인물이 프레임 밖으로 이동하면서도 대사가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장면은 관객에게 오프스크린 사운드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부재 속의 존재를 체험하게 하는 영화적 효과로서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유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분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 사운드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미셸 시옹(Chion)의 사운드 공간 구분은 온스크린, 오프스크린, 앰비언트, 인터널, 온 디 에어, 넌다이제틱사운드를 단순히 분류하는 차원을 넘어, 내러티브 정보 전달과 감정 표현의 효율성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합니다. <경주>의 사운드 활용을 이러한 바탕으로 분석하고, 장률 감독이 어떻게 전통적 사운드 구분을 전복하거나 교차시키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영화 <경주>의 사운드가 불교적 세계관 무상, 무아, 공과 어떠한 방식으로 맞닿는지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보여줌과 보여주지 않음의 미학
온스크린 사운드 – 언어와 정보 전달의 해체
영화 사운드 연구에서 온스크린 사운드(on-screen sound)는 가장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범주로 정의됩니다. 이는 프레임 안에서 음원의 위치가 확인 가능한 경우를 지칭하며, 보통 인물의 대사나 직접적으로 보이는 행위의 소리가 해당합니다.(Chion, 1994) 관객은 이러한 소리를 내러티브의 핵심 정보로 인식하며, 따라서 온스크린 사운드는 인식의 상층 위에 위치하여 주의와 집중을 유도합니다.
영화 <경주>에서 장률 감독은 온스크린 사운드의 전통적 기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킵니다. 최현이 윤희 일행과 함께 참석한 회식 장면입니다. 프레임 안에서 인물들이 오가는 대화는 내러티브의 진행과 거의 무관하며, 정보 전달의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대화는 술자리의 소음, 잡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마치 앰비언트 사운드처럼 배경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온스크린 사운드가 지닌 정보 전달의 우선성이 해체되고, 오히려 감정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하층 위적 속성으로 변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불교적 사유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온스크린 대사는 사건과 의미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지만, <경주>에서는 그것이 곧 공(空) 임을 드러내는 장치가 됩니다. 말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 말은 실질적 의미를 담지 못하고 흩어져 버립니다. 이는 언어와 지식이 절대적 진리를 전하지 못한다는 무상의 사유를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경주>의 온스크린 사운드는 단순한 정보 전달 장치가 아니라, 언어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수행적 장치로 작동합니다.
오프스크린 사운드 – 부재 속의 존재와 색즉시공
오프스크린 사운드(off-screen sound)는 프레임 밖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의미하며, 음원의 가시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스크린 사운드와 구분합니다. 일반적으로 오프스크린 사운드는 감정적 분위기를 보조하거나 공간의 확장을 암시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인식의 하층 위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경우 정보 전달의 핵심이 되면 상층 위로 상승하여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이는 음원의 가시화에 대한 기대와 욕망을 유발합니다.
영화 <경주>에서 주방 장면은 이러한 오프스크린 사운드의 전형적 전복을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인물들이 프레임 밖으로 이동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또렷합니다. 화면은 텅 비어 있으나 소리는 살아 있으며, 관객은 이 부재의 공간을 소리로 채우며 상상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오프스크린 사운드는 단순한 하층 위적 배경이 아니라 능동적 상층 위로 작동하여 내러티브의 긴장을 이끌어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 장면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유와 연결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가 곧 존재를 증명하고, 비어 있는 화면이 오히려 충만한 의미를 생성합니다. 부재가 곧 존재이고, 공(空)이 곧 색(色) 임을 영화적 체험으로 드러냅니다. 관객은 오프스크린 사운드를 통해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이는 영화적 현실과 불교적 사유가 만나는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경주>의 오프스크린 사운드는 단순히 공간적 확장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부재 속의 존재를 드러내고 공의 사유를 체험하게 하는 미학적 전략으로 기능합니다.
앰비언트 사운드 – 외부의 내면화와 연기법
앰비언트 사운드(ambient sound)는 영화의 배경을 구성하는 소리로, 프레임 안과 밖을 동시에 점유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바람, 물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도시의 소음 등이 이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관객의 인식에서 하층 위에 위치합니다. 이러한 사운드는 내러티브의 직접적 정보 전달보다는 감정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공간의 현실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전통적인 영화에서 앰비언트 사운드는 수동적 속성을 전제로 디자인됩니다.
감독은 앰비언트 사운드를 단순한 배경으로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술자리 장면에서 들려오는 옆방의 고성방가, 도심을 스쳐가는 아이들의 목소리, 찻집 문에 달린 풍경소리 최현이 찾아 헤매는 물소리 등은 배경적 소음이 아니라, 주인공 최현과 윤희의 내적 심리와 맞물리며 관객에게 주관적 체험으로 전환됩니다. 예컨대 회식 자리에서 내러티브와 직접 관련 없는 옆방의 소리가 불쑥 부각되는 순간, 단순한 잡음이 아니라 최현의 내적 공허감과 동질화되며 하나의 내면적 울림으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경주>의 앰비언트는 외부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으로 흡수되며, 인터널 사운드와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불교적 맥락에서 이는 연기법(緣起法)의 영화적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모든 존재가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연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함을 강조합니다. <경주>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외부와 내부, 배경과 인물의 경계를 허물어, 내적 심리와 외부 환경이 서로 연기적으로 얽혀 있음을 드러냅니다. 관객은 풍경의 소리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의식과 직결된 체험으로 작용하는 순간, 외부와 내부의 분리가 무의미함을 직감합니다.
<경주>에서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공간적 사실감을 넘어, 내면과 외부가 서로 비추는 관계적 세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합니다. 이는 불교적 연기 사유와 영화적 현실의 긴밀한 접점을 제공합니다.
인터널 사운드 – 환상과 무아
인터널 사운드(internal sound)는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기원하는 소리로 정의합니다. 호흡, 심장박동, 내적 독백, 회상이나 환상 속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이에 해당하며, 항상 능동적 속성을 지니고 인식의 상층위에 위치합니다(Altman, 1992). 관객은 이러한 소리를 단순한 청각적 자극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적 시점을 직접적으로 전달받는 내러티브의 핵심 요소로 경험합니다.
영화 <경주>에서 인터널 사운드의 특징은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최현이 과거의 기억이나 환상을 경험하는 장면에서, 혹은 최현이 공간의 기묘한 기운에 사로잡히는 순간, 관객은 단순한 앰비언트나 배경음으로 치부될 소리들이 내면화되어 작동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예컨대 인물이 무언가를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순간, 바람소리나 풍경의 잔향이 마치 내면의 목소리처럼 울리며, 외부와 내부의 차이는 소거됩니다. 이러한 방식에서 <경주>의 인터널 사운드는 개별적 내면의 목소리를 넘어,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가 겹쳐지는 중층적 공간을 구성합니다.
불교적 사유에서 이는 무아(無我)의 구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아는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없음을 드러내며, 존재가 관계적·유동적으로만 성립함을 강조합니다. <경주>에서의 인터널 사운드는 인물의 고유한 내면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해체하고, 외부 소리와 내면적 체험이 서로 섞여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관객은 이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가 사실상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함을 체험하게 합니다.
<경주>의 인터널 사운드는 전통적 의미의 심리적 독백을 넘어, 무아의 철학을 영화적으로 재현합니다. 외부와 내부의 구분을 해체하는 사운드 디자인은 영화가 불교적 사유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지점으로 기능하며, 관객에게 환상과 현실, 자기와 타자의 경계가 해체되는 체험을 제공합니다.
온 디 에어 사운드 – 자기 반영적 질문과 화두
온 디 에어 사운드(on-the-air sound)는 라디오, 전화기, 텔레비전 등 방송·통신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로 정의합니다. 이 사운드는 프레임 안과 밖의 경계를 초월하며, 상황에 따라 정보 전달의 핵심이 되기도 하고 단순한 감정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온 디 에어 사운드는 인식의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을 자유롭게 오가며, 능동적 속성과 수동적 속성을 동시에 지닐 수 있습니다(Chion, 1994).
<경주>에서 이 범주에 해당하는 독특한 사례가 회식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최현이 내러티브와 무관한 옆방 술자리 소음을 보고 있는데 그 방에 있던 인물이 문을 닫으며 “잘 보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때 관객은 예상치 못한 균열을 경험합니다. 이 발화는 영화 속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마치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메시지처럼 관객의 청각에 도달합니다. 내러티브 안의 대사가 아닌, 내러티브를 넘어서는 메타적 발화로서 기능합니다.
이 장면은 자기 반영성 영화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영화 속 인물이 던진 말이 프레임을 넘어 관객에게 직접 다가오는 순간, 영화는 자신이 영화임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질문을 건넵니다. 불교적 맥락에서 이는 화두(話頭)와 유사합니다. 화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이 제자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언뜻 무의미해 보이지만 수많은 사유를 촉발합니다. “잘 보셨습니까”라는 발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장치임을 직감하게 만듭니다.
<경주>의 온 디 에어 사운드는 통신적 효과를 넘어, 영화의 자기 반영성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작동합니다. 이때 사운드는 내러티브 내부의 사건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인식 상층 위로 도약하여 질문을 던지고, 이는 불교적 화두처럼 깨달음을 촉발하는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넌다이제틱 사운드 – 공의 선언과 마무리
넌다이제틱 사운드(non-diegetic sound)는 내러티브 현실 속에서 음원이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지칭합니다. 대표적으로 내레이션과 배경음악이 이에 속하며, 이는 프레임 안의 세계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넌다이제틱 사운드는 온스크린이나 오프스크린과 달리 프레임 경계에 구속되지 않으며, 관객은 음원의 부재로 인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합니다. 내레이션은 보통 인식의 최상위층에 위치하여 직접적인 정보 전달을 담당하고, 배경음악은 상황에 따라 상층위와 하층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또한 넌다이제틱 사운드가 내러티브 내부로 이동하거나, 반대로 내러티브 사운드가 넌다이제틱으로 전환될 때, 관객은 각성과 쾌감을 경험하게 됩니다(Chion, 1994).
영화 <경주>에서는 전체적으로 배경음악을 절제하며, 사운드의 다층적 실험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풍경소리에 시선이 집중되면서 암전과 동시에 흐르는 노래 "텅 빈 마음으로 텅빈 방을 보네”는 영화 전체를 집약하는 넌다이제틱 사운드로 작동합니다. 이 노래는 내러티브 현실 속 인물이 부르거나 연주하는 소리가 아니며, 외부에서 삽입된 순수한 영화적 음향으로서 관객에게 직접 다가옵니다. 장면이 사라진 빈 공간 속에서 관객은 노래 가사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직설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이는 내러티브와 분리된 차원에서 감정과 사유를 동시에 환기합니다.
불교적 맥락에서 이 장면은 공(空)의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앰비언트와 오프스크린, 인터널 사운드가 부재와 존재, 외부와 내면의 경계를 흔들며 관객을 불교적 사유에 접근시켰다면, 마지막 넌다이제틱 노래는 그것을 정리하는 화두이자 결론입니다. 암전의 공백 속에서 울려 퍼지는 “텅빈 마음, 텅빈 방”은 곧 무상과 무아, 공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넌다이제틱 사운드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기능을 넘어, 내러티브 전체를 초월하여 관객에게 불교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예술적 장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운드로 체험하는 공(空)
영화 사운드는 각 공간 구분은 단순한 기술적 범주가 아니라, 내러티브의 정보와 감정을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 지표입니다. 미셸 시옹의 이론을 토대로 한 온스크린, 오프스크린, 앰비언트, 인터널, 온 디 에어, 넌다이제틱 사운드의 여섯 범주는 사운드가 지닌 물리적 속성과 인식의 층위 형성이 영화적 현실을 구성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영화 <경주>는 이러한 구분을 충실히 따르기보다 전복하고 교차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부재 속의 존재, 외부와 내부의 혼융, 내러티브와 메타적 반영 사이의 긴장을 체험하게 합니다. 온스크린 대사가 내러티브의 중심 정보를 해체하며 허망한 언어의 자취로 기능하고, 오프스크린 사운드는 부재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며 색즉시공의 역설을 구현합니다. 앰비언트 사운드는 인물의 내면으로 흡수되며 연기법의 사유를 드러내고, 인터널 사운드는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해체하며 무아의 세계를 구성합니다. 또한 온 디 에어 사운드는 자기반영적 발화를 통해 화두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마지막 넌다이제틱 노래는 “텅빈 마음, 텅빈 방”이라는 가사로 영화 전체를 공(空)의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이 <경주>의 사운드는 내러티브를 보조하는 장치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적 세계관과 맞닿은 철학적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예술적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사운드 공간의 탐구는 영화의 예술성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기초이며, 특히 장률의 <경주>와 같은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학문적 의의가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의 사운드는 언어의 허망함, 부재 속의 존재, 외부와 내면의 얽힘, 무아, 화두, 공의 선언까지 여섯 가지 사운드를 넘나들며 불교적 사유를 영화적 체험으로 만들어냅니다.
<경주>는 소리를 통해 공을 살아내는 수행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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