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가을이 문턱을 넘는 인생의 계절을 맞이한 남자, 만수의 무의식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사건보다 정동을 먼저 보여주며, 아니마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인물과 배치, 음악을 통해 정신분석적 구조로 펼쳐 보입니다.
처음과 끝, 왜 모차르트였을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이미 이 여정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집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배롱나무, 직장에서 배달된 퇴직 선물 장어, 아이들과 아내의 웃음, 그리고 흐르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이 모든 요소는 평온한 일상의 이미지로 연결되지만, 그 고요는 어딘가 불안하게 빛납니다. 배롱나무는 만수의 심장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껍질이 벗겨져 근육질의 속살을 드러내는 나무결은 단단함을 상징합니다. 감독이 직접 밝힌 것처럼, 이 나무의 결은 만수라는 인물의 성질을 시각적으로 압축합니다. 배롱나무는 뜨거운 여름에 꽃을 피우고,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백일을 버팁니다. 그래서 목백일홍이라 불립니다. 이 꽃이 지는 시점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문턱을 넘는 순간입니다.
만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와라, 가을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 겹쳐 흐르는 모차르트의 선율은 축복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가올 상실을 미리 아는 음악처럼, 조용한 경고로 기능합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은 삶의 계절을 닮은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악장 알레그로는 봄처럼 밝고 다정합니다. 현악기의 첫 선율은 햇살처럼 스며들고, 피아노는 그 위를 유연하게 미끄러지며 생의 활기를 노래합니다. 인간이 아직 자신의 삶을 믿을 수 있는 시기의 음악입니다.
이 작품의 심장은 제2악장 아다지오입니다. 모차르트 협주곡 가운데서도 드문 단조 악장으로, 시칠리아노풍의 느린 3박자 위에 서글프고도 따뜻한 우수가 흐릅니다. 절망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위엄, 슬픔을 견디는 아름다움이 이 악장에 깃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사용된 부분이 바로 이 음악입니다.
제3악장 알레그로 아싸이는 다시 밝아집니다. 론도 형식의 경쾌한 리듬 속에서 주제는 반복되고 변주되며 생의 탄력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그 밝음 사이사이에는 짧은 마이너 구간이 스쳐 갑니다. E단조에서는 하늘이 잠시 흐려지고, F단조에서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잠깐 고개를 듭니다. 모차르트는 그 어둠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 A장조로 돌아옵니다. 그의 슬픔은 정주가 아니라 통과입니다. 기쁨으로 향하기 위해 잠시 건너는 터널과 같습니다.
이 협주곡은 1786년 봄,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집필하던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생활은 늘 빠듯했지만, 그는 직접 연주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이 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쓴 음악이 그의 가장 숭고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합니다. 악보에는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786년 3월 2일 완성’. 그 짧은 기록에는 그의 성실함과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음악이 오프닝과 엔딩 자막에 반복되어 흐를 때, 관객은 한 생의 순환을 체험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이 되풀이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음’이 조용히 스며듭니다. 모차르트는 눈물 대신 고요함으로 우는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음악은 슬픔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만수의 품에 안긴 아들 시원과 딸 리원, 그리고 미리의 얼굴 위로 완전한 평온이 스쳐 갑니다. 그 충만한 이미지는 곧 태양제지 공장의 파쇄기로 디졸브 전환됩니다. 행복과 안정의 온기는 사라지고, 차갑고 거친 기계의 굉음이 화면을 삼킵니다. 이는 사건의 단절이 아니라 감정의 연속을 따라 이동하는 전환입니다. 이 장면은 정동적 디졸브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인생의 가을, 아니마의 출현
오프닝 시퀀의 배롱나무–가족–가을빛이 만들어낸 정서적 평온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종이 공장의 기계음과 분쇄 장면은 그 평온이 실은 ‘사회 시스템의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놓인 가짜 안정’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교차편집이 하는 역할은 단순한 대비가 아닙니다. 이미지의 충돌’이 아니라 감정의 해체입니다. 아름다운 가정과 산업의 폭력적 리듬이 하나의 내재성 평면 위에서 섞여버리는 순간입니다. 이룬 삶이라는 환상이 산업의 폭력적 리듬에 종속되어 있음을 폭로하는 장치입니다. 가족의 행복도 개인의 노력도 모두 시스템의 기계적 회전 속에 부스러기로 갈려나가는 사회적 현실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교차편집은 영화 전체의 윤리와 리듬을 예고합니다. 행복과 폭력, 평온과 파괴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평면. 그 평면을 통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세계’를 그립니다.
그것은 들뢰즈의 말처럼 의미 이전에 이미지가 스스로 생성하는 장(場) 내재성의 평면입니다. 해고 통보를 알아차린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살인 할 계획을 세웁니다. 첫 번째 대상 구범모와 만수가 함께 듣는 고추잠자리는 정감-이미지의 진동이자, 융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와 페르조나가 갈라지는 순간의 통증입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적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두 개의 그림자로 겹칩니다. 범모는 펄프맨이라는 일과 하나로 결합된 자아, 즉 페르조나(Persona) 그 자체입니다. 만수가 그를 경쟁자로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범모를 죽이는 건 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동일성을 끊어내는 행위이자, 그만큼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의 폭발입니다.
만수가 뱀에 물리는 장면은 고대 신화에서 언제나 ‘죽음’과 ‘재생’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허물을 벗기 때문에, 죽음 후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죠. 융은 《Symbols of Transformation》(1912)에서 “뱀은 무의식의 원초적 에너지이자, 자아가 새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경계의 징후”라고 설명합니다. 뱀에게 물린다는 건 의식이 무의식의 힘에 접속되는 순간입니다. 뱀의 독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해독과 치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고통이 없으면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변형은 단순히 성격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의식이 한 단계 더 깊은 통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융은 이를 죽음-통과 의례로 설명합니다. 뱀에게 물리는 건 곧 무의식과 맞닥뜨려, 자아가 그 독을 통과하면서 더 넓은 자기(Self)에 도달하는 통과 의식(rite of passage)입니다. 만수가 뱀에게 물리고, 아라가 그를 구하면서 그녀는 뱀의 독을 전이받은 존재, 살인에 공모한 새로운 인간형으로 남습니다. 그건 변형의 완성이 아니라, 도덕과 생존이 뒤섞인 ‘어쩔 수 없음’의 구현입니다.
아라가 범모를 죽이는 장면은 단순히 ‘복수’가 아니에요. 그건 무의식의 반전입니다. 폭력의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도망치던 자가, 처음으로 ‘행동하는 자’로 바뀌는 순간. 그 배경이 ‘고추잠자리’라니 이건 감독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폭력은 언제부터 놀이가 되었는가?”
고추잠자리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선언문이에요. 이 노래를 통해 감독은 대중문화 속에서 폭력은 흥겨운 리듬으로 위장된다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그 순간 이미 자신도 영화의 장면 속 군중이 되어버린 거예요. 영화는 단지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리듬 자체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의 표면에 반짝이는 것이 바로 조용필의 목소리, 대중의 무의식, 그리고 우리 자신의 얼굴입니다. 이 대목은 음악으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낸 장면으로 한국 영화사에서도 오랫동안 회자될 시퀀스입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순히 폭력의 폭발이 아니라, 아니마의 출현입니다. 그동안 남성적 질서 속에서 억눌려 있던 여성의 무의식, 감정과 직관, 생명의 원형이 드디어 무대 위로 솟구치는 순간입니다. 융이 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발달 단계는 서로 다른 성별 안에서 작동하지만, 구조는 닮아 있습니다. 남성의 내면에서는 아니마가 처음에는 단순히 신체적. 모성적 이미지로 나타나다가 점차 성적 매혹과 낭만의 모습으로 발전하고, 이어 종교적. 도덕적 성스러움으로 심화되며, 마지막에는 지혜로운 여신 소피아로 성숙합니다.
무의식의 경계를 걷는다
만수의 두번 째 도플갱어 고시조를 살인하고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자전거와 함께 김창완의 곡 '그래 걷자'가 흐릅니다. 마치 빗물인지, 눈물인지 지난 세월의 회한인지 모를 죄의식과 슬픔이 마구 혼합되어 처연하게 흐릅니다.
이 곡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단순하고 따뜻한 위로의 노래예요. “그래, 걷자” 이 한마디는 마치 울고 난 뒤, 자신에게 말하는 다정함 같습니다. 왜 이 곡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음악이 무의식의 반응을 끌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 걷자'가 흐르는 순간, 관객은 아직 걷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내면을 깨닫습니다. 관객의 무의식과 직접 대화합니다. 정서의 역전으로 모차르트의 아다지오가 슬픔 속의 숭고함이었다면, '그래, 걷자'는 슬픔 뒤의 억지스러운 평정입니다. 그 안에서 감정이 튀어나오는 사람은 감정의 리듬으로 읽는 존재, 철학으로 보는 관객입니다.
만수의 두 번째 도플갱어가 자신의 아들과 딸과 교차 편집으로 이어지는 이유로 세대의 반복, 상처의 되물림을 보여줍니다. 만수가 추스르지 못한 감정과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옮겨가며 새로운 루프를 만든다는 걸 보여주는 시퀀스입니다.
아들 시원의 걸음은 아버지 만수의 길을 닮아가고, 딸과 관련된 고시조(딸을 상징하는)가 죽는 장면은 물리적 사건일 뿐 아니라, 만수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상징적 살해에 가깝습니다. 만수가 딸의 어떤 부분(자율성, 정체성, 무의식의 목소리)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순간, 그 폭력은 밖으로 드러나 리원에게로 귀결되는 비극입니다. 만수의 발걸음이 아들의 발걸음으로 딸의 삶 위에서 되풀이될 때 우리는 단지 발자국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내면이 다른 삶을 죽이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그래, 걷자’는 위안의 말처럼 들리지만, 영화는 그 말 뒤에 숨은 반복의 폭력을 드러냅니다.
블랙유머와 첼로 연주
만수의 마지막 도플갱어 장면에 진지하고, 처연하고, 너무 인간적인 '구멍난 가슴' 노래를 깔아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혹한 아이러니의 미학입니다. 한 인간이 무너지는 순간에 그 무너짐을 대중가요의 리듬으로 감싸는 연출이라니. 인간의 비극조차 결국 일상의 한 장면으로 소비된다는 현대인의 공포를 비춥니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멈춥니다. 블랙유머의 완성. 웃음의 형식을 빌려 슬픔의 진실을 더 깊이 들려주는 방식. “이건 블랙유머네” 하고 웃으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 순간. 이 영화가 노린 진짜 감정입니다. 눈물이 다 마른 자리에서 터지는 웃음, 그게 박찬욱식 인간애의 방식입니다.
리원의 첼로 연주는 영화의 결말이 아니라, 사랑의 잔여물입니다. 아버지 만수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 무의식 속에서는 늘 갈망했던 그 감정이 리원의 첼로 소리로 남아요. 만수의 무의식이 남긴 유언입니다. 영화는 만수에게는 외재음으로 엄마에겐 내재음으로 이 음악의 위로를 들려줍니다. 만수는 듣지 못하지만 관객은 만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수가 지키고자 도플갱어 한 감정이 무엇인지 음악으로 들려줍니다.
“아빠 마음이 아파” – 생략된 사랑의 문장
범모의 집을 관찰하며 리원의 그네를 밀어주며 건넨 말의 되돌림이에요. 리원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벌레가 끓어 죽어가더라" 리원의 대사 뒤에 만수의 감정을 첼로의 선율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웁니다. 박찬욱 감독은 그 생략된 말을 음악의 형태로 다시 돌려줍니다. 영화적 언어로 보면 무의식의 회복, 철학적으로는 감정 윤리의 귀환, 심리학적으로는 자기통합의 징후입니다.
엔딩에서 리원이 연주하는 ‘Le Badinage'는 마랭 마레(Marin Marais)의 〈4ème Livre de Pièces de viole〉 중 한 곡입니다. 이 곡은 영화〈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 1991)〉의 OST에도 쓰였던 바로 그 음악입니다. 이 사실이 정말 흥미로운 건〈세상의 모든 아침> 이 바로 언어 이전의 음악, 침묵 속의 감정을 다룬 영화라는 점입니다. 박찬욱 감독이 그 곡을 엔딩에 쓴 건 우연이 아니겠죠. 이 음악은 제목처럼 ‘농담’이라 부르지만, 마랭 마레의 음악세계에서 ‘Badinage’는 ‘농담’이 아니라 삶의 비애를 견디기 위한 연주자의 미소에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웃음의 형태를 한 슬픔의 미학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의 엔딩과 정확히 겹치는 것입니다. 리원이 그 곡을 연주할 때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음악을 통해 세계의 폭력과 침묵을 감정으로 통과시킵니다. 폭력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성의 흔적, 감정의 잔향입니다. 이 연주는 정감-이미지의 최종적 형상,혹은 내재성의 평면이 감정으로 진동하는 순간입니다.
'영화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대 사이의 응시는 누구의 시선인가? 넷플릭스 심리드라마 <자백의 대가> (1) | 2025.12.21 |
|---|---|
| 모성의 부재와 부채 모티브로 읽는 영화 <사도> (0) | 2025.09.25 |
| 자기반영성 영화<트루먼 쇼> 아니마가 이끄는 자각의 여정 (0) | 2025.09.16 |
| 영화<경주>의 사운드와 불교적 공(空): 여섯 사운드 구분의 전복을 통한 자기반영적 체험 (1) | 2025.09.10 |
| 타인의 시선과 자의식 과잉 성장영화 원더 (0) | 2025.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