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삶의 커다란 파도 앞에 서게 됩니다. 누군가의 시작을 축복하는 화려한 결혼식의 박수 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누군가의 끝을 배웅하는 장례식의 고요한 적막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은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나는 가족의 연대기를 통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비춥니다.
영화 속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거울이 됩니다. 가족들은 할머니의 곁에 앉아 평소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 고백들은 누워 있는 이에게 닿는 위로인 동시에, 말을 거는 스스로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감정의 순환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도 병상에 누워 계신 부모님 곁에서, 그분이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 믿으며 서툰 진심을 쏟아내던 그 먹먹한 시간들처럼 말입니다.
이 긴 여정의 끝에서, 어린 아들 양양은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마지막 편지를 읽습니다. "할머니, 저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봐요. "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 뜻밖의 고백은, 죽음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 삶의 또 다른 면을 가르쳐주는 통과 의례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슬픔 속에 감춰진 삶의 숭고한 질서와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바이올렛'을 피워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 영화로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 안에 한 가족의 1년여에 걸친 삶의 굴곡을 아주 세밀하게 담아내어 많은 이들에게 '인생 영화'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영화 정보: 《하나 그리고 둘》 (Yi Yi, 2000)
- 제목의 의미: 원제인 '一一(Yi Yi)'는 단순히 숫자 '1+1'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차근차근'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복잡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 긴 러닝타임(173분): 3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 가족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이 쌓여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영화가 끝날 때쯤엔 마치 나의 인생을 돌아본 것 같은 깊은 여운을 줍니다.
- 공간적 배경: 현대적인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합니다. 도시의 차가운 빌딩 숲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따뜻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감독: 에드워드 양 (Edward Yang, 楊德昌)
- 대만 영화의 거장: 허우샤오셴과 함께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 운동을 이끈 세계적인 거장입니다.
- 이력: 원래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시스템 설계자로 일하다가,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입문한 독특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매우 지적이면서도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정교합니다.
- 수상 기록: 《하나 그리고 둘》로 2000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장편 영화가 되었습니다 (2007년 별세).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생의 단계에서 겪는 상실과 깨달음'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3시간의 긴 여정을 핵심적인 흐름 위주로 정리해 드릴게요.
1. 시작: 축복과 불행의 교차 (결혼식)
영화는 처남 '아디'의 화려한 결혼식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잔칫날, 가족의 중심이었던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이때부터 가족들의 평온했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2. 전개: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하는 삶의 위기
의사는 가족들에게 할머니가 깨어날 수 있도록 교대로 곁에서 말을 걸어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할머니 앞에 서서 정작 할 말이 없음을 깨닫고 당황합니다.
- 아빠(NJ): 경영난에 처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일본 사업가 '오타'를 만납니다. 그 과정에서 30년 전 헤어진 **첫사랑 '쉐리'**를 다시 만나 일본에서 애틋한 시간을 보냅니다. "다시 시작한다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결국 인생은 다시 시작해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가족에게 돌아옵니다.
- 엄마(민민): 할머니에게 매일 말을 걸다 보니, 자신이 하는 말이 매일 똑같고 인생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결국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산속에 있는 **절(종교 시설)**로 떠나 수행을 시작합니다.
- 딸(팅팅):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친구 '릴리'와 엮이며 첫사랑의 열병을 앓습니다. 릴리의 전 남자친구인 '패티'와 데이트를 하며 설렘을 느끼지만, 결국 관계의 비극과 인간의 이기심을 목격하며 성장통을 겪습니다. 할머니가 쓰러진 게 자기 탓인 것만 같아 괴로워하며 바이올렛을 정성껏 키웁니다.
- 아들(양양): 학교에서 말썽꾸러기로 취급받지만, 사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앞모습만 볼 뿐 뒷모습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아빠의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고 다닙니다.
3. 절정: 깨달음과 돌아옴
산으로 떠났던 엄마 민민은 "산에서의 삶도 밑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아빠 NJ 역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팅팅은 꿈속에서 할머니와 화해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바이올렛 꽃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4. 결말: 또 다른 시작 (장례식)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은 다시 모여 장례식을 치릅니다. 막내 양양은 할머니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낭독합니다.
결혼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돌아오기까지, 가족들은 각자 긴 여행을 다녀온 것과 같습니다.
- 아빠는 일본(과거)으로,
- 엄마는 절(종교)로,
- 딸은 첫사랑(감정)으로,
- 양양은 사진(진실)으로...
각자 다른 곳을 헤매다 결국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다시 모였을 때, 그들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감동입니다.
팅팅이 바이올렛(제비꽃) 화분
팅팅이 정성껏 바이올렛(제비꽃) 화분을 가꾸던 그 장면들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아픈 성장의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죠.

1. 죄책감을 씻어내려는 '속죄'의 마음
팅팅은 외할머니가 쓰러진 이유가 자기가 쓰레기를 제때 버리지 않아서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깨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죠. 팅팅에게 바이올렛을 돌보는 행위는 말 없는 할머니에게 건네는 가장 정성스러운 대화이자 미안함의 표현이었습니다.

2. 첫사랑의 아픔과 기다림
팅팅은 식물을 키우며 동시에 친구의 전 남자친구인 패티와 복잡한 감정을 나눕니다. 사랑에 서툰 팅팅은 꽃이 언제 피는지 초조해하는 것처럼, 자신의 사랑도 언제 결실을 볼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왜 꽃이 피지 않을까?"라고 고민하는 팅팅의 모습은, 인생의 답을 몰라 방황하는 사춘기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정말 잘 보여준 장면입니다.

3. 용서와 성장의 상징, '개화(開花)'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팅팅은 꿈에서 할머니와 만나 따뜻한 위로를 받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바이올렛이 꽃을 피운 것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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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죽음(상실)과 꽃의 개화(탄생)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 장면은, 슬픔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팅팅이 키우던 바이올렛은 단순히 식물이 아니라, 할머니를 향한 미안함과 첫사랑의 열병이 뒤섞인 팅팅의 마음 그 자체였습니다. 꽃이 피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그 지루한 시간들이 결국 우리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성장의 계절'이었음을, 마침내 피어난 꽃잎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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