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세린의 밴시>(2011.마틴 맥도나)
아일랜드 출신의 영화감독 마틴 맥도나는, 무대극과 영화 양쪽에서 특유의 블랙 유머와 인간 내면의 비극성을 넘나드는 이야기꾼입니다. 그는 《인 브루즈》(2008), 《세븐 싸이코패스》(2012), 그리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쓰리 빌보드》(2017) 등을 통해, 유머와 폭력, 인간의 상처와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해왔습니다.
2022년작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런 그의 세계관이 더욱 간결하고 비극적으로 응축된 작품입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섬 ‘이니셰린’을 배경으로, 평생을 함께해온 두 친구—파우릭과 콜름의 돌연한 단절을 통해, 감정의 균열, 관계의 침묵, 고립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듭니다. 겉보기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친구가 이별을 선언한다. 그것도 말 한마디 없이.” 하지만 마틴 맥 도나는 이 단절의 사건을 통해, 사소한 감정이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를 철학적으로 직조합니다.
섬 전체가 말 없는 전쟁터처럼 느껴지고, 음악조차 불협화음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이 영화는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배경과도 교묘히 맞물리며, 하찮아 보이는 개인적 비극이 어떻게 시대의 비극과 공명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폭발이 없는 전쟁, 피 한 방울 없는 잔혹극.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렇게, 소음보다 더 큰 침묵을 연주합니다.
나의 섬 이니셰린에 봄이 왔습니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2023, 마틴 맥도나)는 쓰나미처럼 밀려온 묵은 감정들을 드러냅니다. 우리 생의 은밀한 비밀창고, 무의식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 사랑, 우울, 불안, 공포, 의존, 질투, 분열, 시기심, 투사와 회피. 이 모든 것은 무의식적 생존 전략입니다. 파우릭이 말하는 ‘다정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그의 다정함은 사실 의존의 한 형태였습니다. 파우릭은 펍에 함께 가기 위해 콜룸의 집에 들르지만, 환영받지 못한 채 집 안에 머무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1923년 4월 1일, 그는 만우절 장난으로 여기고 콜룸에게 다가갔지만, 콜룸은 냉담했습니다. 자유로운 창조성을 추구하는 콜룸은 거리 두기를 선택했지만, 파우릭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들이대는 파우릭에게 콜룸은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들려주며 말합니다.
“남은 인생은 사색하고 작곡하며 살고 싶다.”
무의미한 수다로 시간을 낭비하면 12년 후 무엇이 남겠느냐는 질문에, 파우릭은 “그건 즐겁고 평범한 수다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이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의존성을 기반으로 한 저항이었습니다. 파우릭은 자기 욕망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돌보는 법을 모릅니다. 함께 사는 여동생이 “외로운 적 없어?”라고 묻자, 그는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외로움은 개뿔”이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여동생이 이니셰린을 떠나 본토의 사서로 향할 때, 그는 “내 식사는 누가 챙겨줘?”라는 말로 의존성을 드러냅니다.
15년이나 지난 옛 친구 ‘똥날개’의 말이 귓가를 울렸습니다. “모른다고 죄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두 배가 된대요.” 그녀는 과거 내가 운영하던 중개사무소의 직원이자 친구였습니다. 아침 회의 시간, 개인 전화를 자제해 달라는 제 말에 벌어진 갈등이 그때의 단초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4월의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저녁, 서툰 운전으로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었을까요. 똥날개, 순딩, 그리고 사붓이 함께했습니다. 이태원 골목을 지키기 위해 재능기부로 제작된 그림들을 보기 위해 작가들을 응원하며, 사무소에 그림을 걸었습니다. 그로부터 ‘아파트갤러리’라는 작은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이 일이 되고, 일이 예술이 될 수 있으리란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너졌습니다.
콜룸과 파우릭의 대화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상호 의존적으로 맺어진 친구의 분노가, 결국 자기애적 분노였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난 15년을 다르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난 이제 너랑 말도 섞기 싫어.”
“콜룸, 당신 전에는 어땠는지 알아요?”
“다정했어요.”
“다정함이 영원히 남진 않지.”
“무엇이 영원히 남는지 알려주지.”
“음악, 그림, 시…”
똥날개와의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제 안의 오래된 그리움과 의존의 뿌리를 향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만나온 수많은 ‘파우릭’들. 반복되는 감정의 파도 위에서, 외면하던 감정의 민낯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콜룸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말한 극단적 선언은 단지 파우릭의 신경을 건드리는 기행이 아니었습니다. 잘라낸 손가락은 파우릭의 집 앞에 던져졌고, 그의 당나귀가 그것을 먹다 목에 걸려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콜룸은 파우릭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똥날개가 콜룸 같은 말을 내뱉고 떠난 뒤, 저는 오랫동안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동안 제 당나귀는 죽었고, 잠들어 있던 깊은 본성이 고요히 깨어났습니다. 콜룸이 말한 ‘영원함’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가의 고독한 충동이 저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
의존성은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 담배, 쇼핑, 사이비 종교, 무당에게 앞날을 묻는 행위, SNS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려는 충동 모두 의존성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파우릭의 다정함이 사라지자 그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동생 시오반의 돌봄, 오후 두 시의 맥주, 귀여운 당나귀.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의존 대상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건강한 의존과 병리적 의존을 구분합니다. 병리적 의존은 유아가 어머니에게 전폭적으로 기대듯,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합니다. 저 또한 똥날개 없이 사무소 운영을 지속하지 못했고, 한동안 술에 의지했습니다. 이후에는 철학과 심리학에 빠졌습니다. 그런 의존을 자각한 뒤에야, 제 심리적 배경을 짚어낼 수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누군가의 마음을 걷듯 읽었습니다.파우릭은 콜룸의 집에 불을 지르며, 무의식의 불을 피웠습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심 리상담, 마음치유 프로그램, 치유글쓰기를 통해 무의식을 불태워 왔습니다.
제게 의존성을 보였던 파우릭들은 대개 친근함으로 접근했습니다. 자주 전화를 걸어 사소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외로울 때 술을 마시자며 거절의 여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집을 태운 걸로 이제 끝인가요?”
“집 안에 있었어야 끝이죠.”
“당나귀 일은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본토에서 총성이 멈춘 지 이틀 됐군요.”
“끝나가는 모양이에요.”
“분명히 또 시작될 거예요.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파우릭, 내 개를 돌봐줘서 고마워요.”
“언제든 말하세요.”
“서운하겠지만 잘 들으세요.
당신이 원하는 건 나와의 시간이 아니라, 유년기의 아기가 환상 속에 창조해 둔 엄마의 보살핌이에요.
그러니 나와 다정한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어요.”
콜룸은 파우릭에게 부당한 의존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파우릭이 불을 지른 행위에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담담히 바다 건너 본토를 바라보며, 조용히 음악을 흥얼거릴 뿐이었습니다.
저는 억압된 분노를 투사하는 파우릭들을 피하려고 이직하거나, 스스로 잠수를 타기도 했습니다. 라캉은 정신분석 말미에 내담자가 느끼는 감정을 ‘고립무원의 감정’이라 표현했습니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할 때, 비로소 독립이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콜룸과 파우릭이 고립된 이니셰린 섬이 아니라면, 관계는 달라졌을까요? 영화 속 달력은 1923년 4월 1일. 아일랜드 내전이 끝나가던 무렵으로 시공간을 상징합니다. 영화 속 이니셰린에는 봄이 왔을까요?
저의 섬 이니셰린에는 상실과 통증을 연민으로 감당하며, 붕괴된 마음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내전의 섬, 우리 모두의 이니셰린”
1923년 4월, 영화 속 이니셰린 섬의 하늘 아래, 실제 아일랜드는 내전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형제끼리 총을 겨누어야 했던 비극의 역사.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로를 해치는 상처가 되었던 시간. 그 전쟁은 이니셰린에 들리지도, 설명되지도 않지만, 파우릭과 콜룸 사이의 단절, 침묵, 폭발, 무의미한 복수심 속에서 그 전쟁의 메아리는 또렷하게 울립니다.
이니셰린은 단지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관계의 끈이 풀리고, 말이 더 이상 닿지 않으며, 다정함이 원망이 되는 그 모든 순간 우리는 모두 이니셰린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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